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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018
제52호
제52호
지역학 칼럼
예산학 특강 - 秋史 美感의 現代化 可能性 考察
김영한의 이 말은 추사를 동파와 거의 동일시한 입장에서 나온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추사
과 추사체의 완성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앞서 살펴본 추사서예의 전변 제2기에 추
는 동파로부터 영향받은 점이 많으며 또 동파와 비슷한 점도 많았다. 옹방강의 계도로 동파를 자신
사체의 조형은 사실상 이미 다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주도 유배 이후의 글씨나 그 이전 40대
이 지향해야 할 예술노선의 기준으로 삼은 추사는 동파뿐 아니라 황정견, 미불 등 송대 상의서풍(
후반, 50대 초반에 걸쳐 제작된 글씨 사이에 조형상의 큰 차이는 별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尙意書風)을 주도한 핵심인물에 대해서도 보다 깊이 있게 공부하여 결국은 송대 상의서풍을 자신의
또한 추사의 지우였던 권돈인(權敦仁)은 “완당의 제주도 유배 이후 글씨는 두보의 기주(夔州) 이
서예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서 인용한 대로 박규수는 추사 서
후의 시(詩)나 유종원의 유주(柳州) 유배 이후의 문(文)과 같다”고 하여 그 이전의 글씨와 분리시키
예의 전변 과정을 “옹방강을 좇아 옹방강의 글씨를 적극적으로 모방한 까닭에 농후한 맛은 있으나
고 제주도 유배 이후의 추사 글씨를 기주 이후의 두보 시와 유주 유배 이후의 유종원의 문장이라
골기가 부족한 흠이 있었다”고 말한 뒤 “이윽고 소동파와 미불을 따르다가 이북해(李北海)의 글씨로
고 비유하였는가? 그 비유의 의미는 무엇인가? 박규수의 “서예학습의 행보에 더 이상 어떤 구속받
변해갔다”고 하여 추사가 한때 옹방강의 글씨를 추종했으나 결국은 소동파와 미불 등 송대 상의서
음이 없었다(無復拘牽步趣)는 말과 권돈인의 ‘비유’ 속에 제주도 유배 이후 추사 글씨의 변모에 대
예가로 경도되어 갔음을 지적하였다.
한 해답이 들어있다.
그리고 ‘이북해로 변해 갔다’는 구절은 추사가 동파를 추종하다가 결국은 동파 서예의 뿌리인 이
송나라 황산곡은 “두보의 기주 이후 시와 한유가 조주(潮州)로부터 환조(還朝)한 후의 문장은 모
북해로 나아갔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동파의 행서는 상당부분이 이북해에 연원을 두고 있기 때문
드 번거롭게 먹줄을 치고 대패질하여 다듬지 않아도 저절로 부합하는 건축술과 같았다”고 말했다.
이다. 이점은 동파의 대표작인 권(卷)에 붙인 황산곡의 발문 중에 “이 글
여기서 황산곡은 기주(夔州) 이후의 두시(杜詩)를 ‘먹줄치고 깎아 다듬지 않아도 저절로 부합하는
씨는 안진경, 양응식, 이건중(李西臺)의 필의를 겸하였다(此書兼顔魯公楊少師李西臺筆意)는 말을
(不煩繩削而自合)’ 시라 하기도 하였고, ‘간단하고 쉬우면서도 대교가 들어 있으며(簡易而大巧出焉
통해서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과 이북해의 대표작인
)’, ‘평담하면서도 그 안에는 고산(고산), 심수(심수)가 내재해 있어서(平淡而高山水深)’, ‘깎고 다듬은
)>의 자형을 비교해 보면 더욱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북해는 당대(唐代)의 ‘상법서예(尙
흔적이 없는 시(更無斧鑿痕)라고 하였다. 이는 바로 ’무법의 법‘이요, ’탈기교의 기교‘의 경지를 말한
法書藝)’ 분위기 속에서도 ‘자출신의(自出新意)’한 서예가로 알려져 있다.
다. 즉 붓 가는 대로 맡겨 두어도 자연히 시가 이루어져 무법인 듯 하면서도 어느 한 구석 법 아닌
요약컨대 추사는 35세 이후부터 동파를 비롯한 송대의 서예가들을 좇아 그들의 학고 태도와 방
곳이 없는 그런 시가 이루어 진다는 경지를 말한다.
법 및 창신정신과 상의(尙意)정신을 취하여 자신의 서예세계를 구축해 가는데 추사가 그러한 노선
중년의 추사는 앞서 말한 구신(求新), 구변(求變), 구기(求奇)의 창작욕과 더불어 자신을 드러내고
을 취하게 된 것은 옹방강의 영향과 계도에 힘입은 바 크다. 그리고 동파를 좇던 추사는 동파서예의
자 하는 욕구가 상당히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은 ‘조선 서단과 조선 서예가에 대한 혹독
연원소재인 이북해의 글씨로 소원해 올라가게 되고 아울러 옹방강이 강조한 또 하나의 서예가인 구
한 비판’ 등 그 의 서론문장을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양순의 신수(神髓)를 파악하여 자신의 서예세계로 끌어들었다. 그러나 구양순의 글씨와 추사글씨
추사의 이러한 비판은 물론 당시 조선 서단의 병폐를 제대로 지적한 탁월한 비판이라고 할 수도
는 이념과 정신면에서는 다분히 상통하지만 형사(形似)한 면은 찾기 힘들다. 따라서 35세 이후부터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료가 부족한 당시의 상황에서 직접 청나라에 새로운 서풍을 접하지 못한
제주도로 유배되는 55세 이전에 쓴 추사의 글씨 중에는 이러한 구신(求新), 구변(求變), 구기(求奇)
조선 서예가들로서는 어쩔 수 없이 범할 수밖에 없었던 결점일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결
의 욕구들이 짙게 나타나고 있다.
점을 비판하는 추사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점이다. 물론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을 깊은 안목으로
살펴보고 그것을 도입, 전파시키려는 추사의 의지와 그 의지에 수반된 강한 비판정신 자체는 문제가
3. 제3기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를 매도하다시피 한 추사의 태도도 문제가 없지 아니하다.
그러나 추사는 자신의 행적과 예술을 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시기인 제주도 유배시절을 겪었다.
박규수가 추사의 중년의 글씨와 만년의 글씨를 구별하여 “만년에 제주도 유배과 유배로부터 방환
즉 의도적인 창신의 ‘욕(欲)’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의 경지 ‘진(眞)’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된 후에는 서예학습의 행보에 더 이상 어떤 구속받음이 없이 여러 명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
그래서 박규수는 제주도 시절 이후의 추사 글씨를 ‘더 이산 어떤 구속을 받음이 없는 글씨’로 평했
가를 이루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타당한 말인가?
을 것이다. 즉 만년의 글씨가 중년의 글씨에 비해 구신(求新), 구변(求變), 구기(求奇)의 ‘욕(欲)’으로
물론 환경의 변화는 한 예술가의 예술세계에 막대한 연향을 주기 때문에 추사의 제주도 유배생활
부터 벗어나 자연의 경지인 ‘진(眞)’의 경지를 지향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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