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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 보내 주었다. 추사는 이에 대한 고마움과 남다른 감회에 젖어 1844년(헌종 10) 그의 나
도에 어긋나는 것이라 하였다. 추사의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은 31세 이전의 초기 저
이 55세에 이상적에게 「세한도(歲寒圖)」라는 그림을 그려주었다.
술인데, 이 제목은 『한서』 「하간헌왕전」의 ‘수학호고 실사구시(修學好古 實事求是)’에서
연유한다. 안사고(顔師古)는 이 구절을 해석하기를, “사실을 얻기에 힘쓰고 항상 참되고 옳
은 것을 구한다.”라고 하여, ‘실사구시’를 사실에서 진리를 구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실
사구시는 추사의 학문하는 태도로서, 근거 없는 ‘공소지술(空疎之術)’이나 ‘선입지언(先入
之言)’으로 하는 학문을 해서는 유학의 본래 정신인 성현지도에 어긋남을 의미한다. 아울러
성인의 도는 궁행에 있으므로 공론을 숭상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실한 것은 마땅히 구하
고 허한 것은 의거함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추사는 훈고를 위한 훈고나 고증을 위한 고증
을 지양하여, 훈고나 고증 그리고 금석학이 어디까지나 성현의 도에 이르기 위한 수단임을
세한도???출처:문화재청
분명히 하였다. 그는 성현의 도를 큰 집에 비유하고, 주인이 거처하는 곳은 방이지만 대문
추사는 이 그림 속에서 3백 자에 달하는 해설을 써 넣었는데, 그림과 글씨와 그 내용이 삼
과 뜰을 거치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성현의 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훈고의 방법
위일체가 된 명작을 이루었다. 이상적은 이 「세한도」를 받고 감격하였고, 이를 가지고 북경
이 필요하다 하였다. 이와 같이 추사는 학문의 목표를 성현지도에 두고, 그에 이르는 확실한
으로 가서 그곳의 이름난 문사들에게 보여주니 그들도 감탄해 마지 않았다. 또한 이들 16인
방법으로 훈고 또는 금석학을 활용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훈고학, 정주학, 육왕학의 경계를
의 제시(題詩)를 얻어 귀국하여 제주도에 있는 추사에게 보이니, 그 또한 제자의 정성과 중
나누어 다투는 것은 무의하다고 보고, 오로지 실사구시의 실천만이 학문의 정도라고 보았다.
국 문사들의 온정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추사는 그의 스승 박제가와 신작(申綽), 정약용, 이덕무(李德懋) 등의 실용, 실증, 실효의
2.예산의유교학풍
학풍을 계승하였으며, 그의 저술로는 『완당집(阮堂集)』,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금석
과안록(金石過眼錄)」 등이 있다.
김정희는 실용적인 면보다 실사구시로 표방되는 실증적 학문 방법에 더 관심을 보였다.
앞에서 예산의 유교적 학맥을 검토해 보았는데, 이를 통해 예산의 유교학풍이 무엇인가
이는 종래의 송대 성리학이 의리론적 관점에서 경학을 해석한 것과는 다른 것으로 한대의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첫째는 도학풍 내지 의리학풍이다. 조선 초 사화 시기의 유학풍을 도학
훈고학적 해석 방법이 중시됨을 의미한다.
이라 부르는데, 이는 자기수양, 자기관리를 전제로 나라와 백성에 대한 책임감과 우환 의식
그러나 추사는 송학(宋學)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입장이 아니라 옹방강의 한송(漢宋)
을 갖는 데 특징이 있다. 먼저 자신이 군자로서의 인격과 학문을 갖추어야 하고, 항상 나라
절충론에 동의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추사의 실학은 궁극적으로 성현지도(聖賢之道)의 구
와 백성을 근심 걱정할 뿐 아니라 부국강병과 민생의 안정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김
현에 목적이 있으며, 그것은 곧 실사구시(實事求是)로 이어진다. 따라서 그는 학문의 도가
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로 이어져 온 이 조선의 도학풍은 멀리 정몽주-길재의 충절의
이미 요, 순, 우, 탕, 문왕, 무왕, 주공, 공자로 돌아가면 마땅히 실사구시의 실학이라고 규정
리를 계승해 온 것이며, 조선 초 수양대군에 맞서 정의를 지키다 희생된 사육신, 생육신의
한다. 또한 『한서(漢書)』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라고 한 말
충절의리를 계승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의리정신은 대내적으로는 부정과 불의에 맞서 싸우는
은 학문에 가장 긴요한 도이며, 만일 실(實)로써 일삼지 않으면 다만 공소(空疎)한 방법이
용기로 나타나고, 대외적으로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자주독립정신으로 드러나게 되
되고, 다시 그 옳음을 구하지 않고 다만 선입지언(先入之言)을 위주로 하면 그것은 성현의
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 유학사에서 연면하게 이어져 온 도학정신, 의리정신은 예산의 유교
3.선비의고장,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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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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