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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머물던 어느 날 새벽에 범종 치는 게송을 듣다가 두 번째 깨달음을 얻고서야 천장사로 돌아갔다.
그 후 1904년 2월에 경허로부터 깨달음을 인가받고‘만공’
이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傳法偈)를 받았
다. 다음 해에 수덕사에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머물기 시작하면서 수덕사와 정혜사, 견성암, 서산 간월암
등을 중창했다. 만공은 경허를 이어 근대 한국 불교 선원(禪院)의 체계를 확립했고 능인선원과 견성암 등
을 통해 선불교를 중흥시켰다. 경허를 개조로 하고 만공을 중흥조로 하는 수덕사 덕숭문중도 그에게서 비
롯되었다. 만공과 관련된 일화는 매우 많으며 마곡사 주지로 있던 1937년의 31본사 주지회의에서 일제의
미나미 총독을 크게 꾸짖은 일도 유명하다. 만공은 1946년 10월 20일 목욕재계하고 나서 거울에 비친 자
신을 보며“자네와 내가 이제 인연이 다해 이별하게 되었네 그려.”
하고 껄껄 웃은 뒤 문득 입적했다고 한
다. 세수 76세이고 법랍은 62세 때이다. 수덕사에는 그의 부도인 만공탑(滿空塔)이 금선대 근처에 세워졌
다. 아산 송악의 봉곡사에도 오랜 동안 주지를 맡았던 비구니 묘각(妙覺) 스님이 약 20년 전에 공들여 조
성한 만공탑이 있다.
[12] 민병길
閔丙吉·庚壽
<1884. 5. 22 ~ 1942. 10. 19>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온양 좌부동에서 태어난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1923년에 중국 남경
(南京)으로 망명했으며 만주에 있는 다물단(1921~)에 가입해서 활동했다. 이 후 윤기섭(尹琦燮)·신익희
(申翼熙)·안재환(安載煥) 등과 1929년에 남경에 모여서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을 조직했다. 이들은 사
상의 정화와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을 도모하는 동시에 무력행동을 목표로 하는 철혈단(鐵血團)도 창단하
여 안재환을 단장으로 하고 김창화(金昌華)·나월환(羅月煥)·이건호(李健浩)·이영희(李英熙)·최경수
(崔景洙) 등을 중견단원으로 하여 항일독립투쟁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한국혁명당에서는 당기관지「우리
길」
을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며 동지들을 훈련시켜 대일항쟁에 적극 참여하도록 하였다.
1933년 초에는 이세호(李世鎬)·이동초(李東初)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1935년에는 이청천(李靑天)·연원명(延圓明) 등과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간부
로 활약하기도 했다. 1936년에는 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간부로 신당운동을 거부하던 이동녕(李東
寧)·이시영(李始榮)·김구(金九)·차이석(車利錫) 등과 항주(杭州)에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새로이
창당했다. 이듬해에 엄항섭(嚴恒燮)·안공근(安恭根)과 함께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9년에 다시 임
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어 1942년 중경에서 사망할 때까지 활동을 계속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3] 박안라
朴안라
<1853. 10. 16 ~ 1922. 5. 27>
아산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며 본관은 밀양이다. 생원 박준호의 장녀로 황해도 백천군에서 태어나 16세
때 군수 이도희(李道熙)와 결혼했다. 품성이 명민(明敏)하고 문학과 역사에 능숙하며 사람들을 예의로 대
하였다. 자녀 교육에도 법도가 있었고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잘 도와 주며 자신은 돌보지 않고 항상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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