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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잊혀진시간을말하다3
하였는데, 1917년 일제치하 경찰의 무례함에 지팡이를 휘둘렀다가 1주일 동안 경찰서에 감
금되고, 이때 경찰이 주는 음식은 물론 가족들이 가져온 음식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고초
를겪던중호적이름이김화식이아니고김우동이어서풀려날수있었다.
김화식선생의집안은원래경기도파주시광탄면방축리에살다가보령시청라면신산리
로이주하였다.김호준씨의5대조가파주에서화재를당했기때문이었는데당시고조부는
부령부사로 근무하고 있다가 화재소식을 듣고, 자기 처가인 보령 신산리 구병사집으로 집
안을 모셔왔던 것이다. 김호준 씨의 고조모가 청라 구병사집 후손이었다. 현재 청라에서는
구병사집을찾을수없다.
김호준씨의5대조가청라로이주한후,고조부도함께와후손을두었다.고조부의아들
3형제는 모두 무관 벼슬을 하였다. 그 중 김화식 선생의 아버지가 차남으로, 강계부사가 명
을받았으나부임하지못하고37세로돌아가셨다고전한다.
김화식 선생은 외아들이었고, 집안일 대신 부친의 친구인 의암(유인석)선생에게 학문을 익
혔다.혼인후3남1녀를두었고,중국에서귀국한후작은아버지가사는당진군신평면으로
이주하였다.이곳에서첫째부인과사별하자작은부인을얻어2남을낳았다.호적도이곳에
서 올려 원적지가 당진군 신평면 한정리이다. 그후 파주, 홍성군 홍동면 수라니, 대천의 사
위네등지로거주지를옮겨다녔다.
김화식 선생의 첫째 아들(김태진,金泰珍,제적부에는 金昌善)이 4세경 첫째 부인을 잃었고, 재혼
하여 아들 둘(金昶珍, 金英珍)을 두었다. 청소로 이주하였을때 처음에는 대숲말에 살다 그 집
을 큰아들에게 주고, 다시 뱀굴로 이주해 둘째 부인과 아들들과 함께 살았다. 그리고 서당
훈장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 그에게 배운 사람들은 황순오, 황복수, 이성근, 김익
현, 허준씨 등이었다. 이중 김익현씨는 교장을 역임하였고 허준씨는 신문기자 한학자로 활
동하였다.
김화식선생의아들3형제는모두학교에보내지않았다.집에서한문만가르쳤다.
김화식 선생 집안은 청라면 의평리에 살던 지주 이석구의 집안과 관련이 있었다. 전해오
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석구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목수여서, 청라로 내려온 김호준 씨의
고조부 집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 이석구의 집안은 몹시 가난하여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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