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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공세리 성당이 처음에는 아산, 천안, 공주, 그리고 진천과 안성 지역까지도 관할했는데 1897년에
공세리 본당 산하의 공주 공소를 본당으로 독립시키면서 2대 주임이었던 기낭에게 맡겼고 1901년에는 안
성 공소를 분리해서 독립시켰다.
드비즈 신부의 업적과 관련하여 또 의미 있는 것이‘이명래 고약’
이다. 당시 인근 주민들이 종기나 부스
럼 등 각종 피부질환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치료를 위해 서양 의학·식물학 지식과 한의학 지식을 이용해
1906년에 만든 것이 시초다. 당시 16세였던 이명래(李明來, 요한, 1890~1952)는 드비즈 신부를 도와 치
료를 해가면서 고약을 만드는 비법을 전수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처음에는‘성일론 고약’
이라 했는데
이명래가 여러 지역에서의 임상 치료 과정에서 민간요법을 추가하면서‘이명래 고약’
을 만들어 1920년에
서울로 진출하게 된다. 또한 드비즈 신부가 성당의 미사 때 쓸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인근 지역에서 포도
를 재배한 것이 안성까지를 포함하여 이 일대를 포도의 주산지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그는 1932년 말에 쓰러져서 치료를 위해 프랑스로 돌아갔으나 이듬해 8월 31일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
으며 묘소도 그 곳에 있다. 금년(2008.9)에 공세리 성당은 구 사제관을 개조해서 박물관을 개관했다. 이
때 드비즈 신부의 손자인 미쉘 드비즈(68)씨 부부가 참석하고 드비즈 신부 관련 유물 13점을 기증했다.
[11] 만공
滿空
< 1871. 3. 7 ~ 1946. 10. 20 >
전북 태인 출신으로 근대의 대표적 선승(禪僧)이다. 속
명은 송도암(宋道巖)이고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법호
는 만공이고 법명은 월면(月面)이며 도호(道號)는 수산
( 山)이다. 아버지 신통(神通)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를 따라 13세 때인 1883년 말
에 금산사에 가서 며칠 동안 머물면서 처음 불상과 스님
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아 출가할 뜻을 세웠다고 한다. 절
에서 돌아온 얼마 뒤(1884년) 밤에 몰래 집을 나와 몇
곳의 절을 거쳐 계룡산 동학사에서 진암(眞巖)의 문하로
출가했다. 그 해 10월 동학사에 들른 한국 불교 중흥조
<만공탑>
경허(鏡虛)선사를 따라 서산 천장사(天藏寺)로 갔고 12
월 8일 태허(泰虛)를 은사로 경허를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고 월면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893년 어느
날 절에 잠시 와서 머물던 한 아이가“사람들이‘모든 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
는가’
(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말만 알면 생사에 해탈하고 만사에 막힘이 없어진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
슨 뜻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때부터 이것을 화두로 참선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참구하기 위해 1893년 말경(정확한 일자는 미상)에 온양 봉곡사(鳳谷寺, 아산시 송악면 유
곡리)로 와서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1895년 7월 25일 새벽에 마주하고 있던 벽에 홀연히 일원
상(一圓相)이 나타나고 범종을 치면서 화엄경의 게송을 읊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 뒤 공주 마
곡사 토굴과 동학사 등 각지의 여러 절을 다니며 계속 정진했다. 1901년 여름에 양산 통도사 백운암에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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