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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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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해야 했던 어머니는 몸이 허약하여 젖이 나오지 않았고, 젖배를 골은 이규녀 씨는 어린
시절부터 약골의 몸으로 성장하였다. 당시 주문진에는 오징어와 명태가 많이 잡혀 열 살만
넘으면 일판에 나가 일을 하였다. 명태 20마리를 손질하면 당시 돈으로 1원을 받았는데 일
을하면서점차건강이좋아졌다.
“그래도 주문진에서는 밥은 먹었어. 오징어 철이나 명태 철에는 애기손두 빌렸으니께. 오
빠가배를타면서돈도벌었고.”
어머니는 길쌈을 잘해 오징어 명태 철이 아닐 때는 길 위 장사로 돈을 벌었고, 이규녀 씨
는 어머니를 도왔다. 강릉의 전주 이씨 종친회에서 “양반이 배를 탄다.”고 질타해서 오빠가
어려워하던것을본외에는일제강점기치고는견딜만한어려움이었다.
평생을좌우한6.25동란
“다시전쟁이난다면자살하지그걸겪을수는없어.”
그녀의 나이 15살에 전쟁이 났다. 그리고 그녀의 가족이 한국전쟁을 겪은 곳이 하필 주문
진이었다. 전쟁 전 38선이 그어졌을 때 불과 30리 밖인 양양이 북한 땅이었고, 전쟁 후에는
속초까지 남한 땅이 되었다. 그런데 휴전선이 그어지기 직전까지 한 치라도 더 차지하려는
남북의대결이치열하여다시는경험하기싫은포성과전쟁을꼬박3년동안겪어야했다.
인민군이내려오면미군배가육지에포격하고비행기가폭격하는데,밤낮이없었다.
특히 밤에 행하는 포격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죽는다
해도어쩔도리가없었다.
인민군 치하에서는 오빠가 잡혀가 인민군이 되었다가, 패전한 어지러움 속에서 도망을
오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것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는 것이었다. 피난 나와 먹을
것이 없어 남의 집 하지 감자를 캐 먹던 피난민이 포격으로 사망하는 것을 봐야 했고, 하천
의 나무다리를 한 줄로 건너가던 피난민 사이로 포탄이 떨어져 여러 사람이 죽는 현장도 보
았다. 나무다리를 건너다가 자식을 잃은 여인이 자식의 시신을 잡고 오열하다가 냇물 바닥
의 모래로 시신을 묻고 도망가는 현장도 보았다. 1950년부터 흉년이 들어 옥수수 가루를
주먹밥처럼뭉쳐먹었지만배고픔보다죽음의두려움이언제나더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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