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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018
제52호
제52호
지역학 칼럼
예산학 특강 - 秋史 美感의 現代化 可能性 考察
의 뒷전에 설 수밖에 없으니 스스로 일가를 이룰 때 비로소 진실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고 역설
일, 동파의 진적(眞籍)인 천제오운첩(天際烏雲帖, 別名嵩陽帖)을 구입하고서 기쁨을 가누지 못한
하였다.
9)
이는 ‘송인상의’를 대변하는 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채, 자신의 서재를 소재(蘇齋)라 하고 만년엔 이 소재라는 재호(齋號)를 아호로 주로 사용한 일 등
송나라 사람들이 ‘상의(尙意)’의 서예관을 실천하기 위해 학고(學古)와 효서(曉書)를 주장하며 개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옹방강은 만년에 알게 된 추사에게 자신이 흠모하고 추앙한
성을 표현하는 창신(創新)의 전제를 세웠다. 여기의 개성은 제멋대로의 개성이 아니라 수양된 인품
동파를 소개하고 동파가 취한 학문, 예술의 길을 좇도록 지도한 것이다. 아울러 첫 대면 때에 그가
으로서의 개성이었으므로 그들은 훌륭한 서예작품 창작의 필수조건으로 속기(俗氣)가 없는 인품
애지중지한 동파의 을 추사에게 보여주었고, 훗날 자하가 연경에 갔을 때
의 형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인품 형성의 첩경으로 다독서(多讀書)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송인들
에는 자하 편에 모각본과 송참본(宋?本) 4함(四函) 31冊
이 창신의 전제로 재시 한 ‘학고’의 방법으로 옛 사람들의 서예 유산에 대한 임서(臨書), 특히 형임(
을 보내기도 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을 통해 옹방강이 추사에게 동파를 얼마나 중시하여 소개하
形臨)을 강조하지 않았고, 그들은 전대(前代)의 서적(書跡)을 다관(多觀. 많이 보고), 세관(細觀. 자
였는지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겠다. 추사는 옹방강의 이러한 소개와 계도(啓導)에 힘입어 동파로서
세히 보고), 숙관(熟觀. 익숙하게 보아서)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를 통하여 서예의 본질적인 미감을
자신의 지향해야 할 예술노선의 기준을 삼은 것이다.
12)
그러므로 남병길(南秉吉)은 다음과 같이 말
감각적으로 터득하여 깨달음의 안목을 갖게 되는 것을 ‘효서’라고 하였다. 그리고 ‘효서’를 하게 되면
하여 동파와 추사를 연관지었다.
임서(臨書)는 사실상 불필요한 것으로 자신이 표현하려는 개별적인 표현능력, 즉 손의 능력만 키워
자신의 안목에 비친 자신의 글씨를 표현하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능력을 그들은 ‘
일찍이 듣기에 동파공(東坡公)은 “외형(外形)을 닮게 하는 형사(形似)함으로써 그림을 논한다면 그
것은 어린애의 견해만큼이나 유치한 것이다. 또 시를 지음에 있어서 ‘시란 반드시 이렇게 지어야 한다’
수상응(心手相應)’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동파는 “진실로 서예의 본질적 의의에 통하기만 하면 더
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시를 아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추사공의 서(書)나 화(畵)
이상 배우지 않아도 된다”
10)
고 하였으며 황산곡은 “난정 서예가 비록 진행서(眞行書)의 으뜸이기는
13)
뿐 아니라 시(詩)까지도 동파공의 이러한 견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지만 한 획 한 획을 다 표준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11)
고 한 것이다.
추사는 바로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송인상의’의 상의적 서예관을 갖고, 송인들이 취했던 ‘다
그리고 김영한(金寗漢)은 추사를 동파와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관’, ‘세관’, ‘숙관’을 중시하는 ‘학고’의 방법을 통하여 자오자득(自悟自得)의 안목 즉, ‘효서’의 단계에
이르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 중에는 착실한 형임의 글씨가 거의 없고, 35세 이후의 작품
추사는 세상 사람들이 근접할 수 없는 뛰어난 재주를 가졌으며 또 나라를 빛낸 일꾼이라는 점에
중에는 중체(衆體)를 ‘다관’한 후에 형성된 자기 안목을 표현하려는 구신(求新), 구변(求變), 구기(求
서 동파와 같고, 널리 듣고 많이 알아서 그 이름이 천하에 가득했던 점이 동파와 같으며, 입신지경(
奇)의 창신적 흔적들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추사는 송인(宋人)들이 주장한 ‘수양
入神之境)에 이른 서법과 묘경(妙境)에 이른 그림이 동파와 같고, 하늘의 은혜를 입어 역대로 명문
된 인품으로서의 개성표현’이라는 창작의 방법과 인품수양을 위해 제시한 ‘다독서(多讀書)’라는 방
의 가계를 이어오다가 화를 당하여 몰락한 후손으로 유랑하거나 숨어 지내게 되어 영고성쇠(榮枯盛
법도 취하여 자신의 예술창작에 적용하는데 추사가 누차 강조한 ‘서권기(書卷氣), 문자향(文字香)’이
衰)를 본명(本命)대로 하지 못했으나 그러한 와중에서도 마음가짐이 초연하여 진세(塵世) 만물의 밖
바로 그러한 추사의 태도를 확인해 주고 있다.
에 홀로 우뚝 선 모습도 하나 같이 동파와 다르지 않다.
14)
35세 이후의 추사가 ‘송인상의’에 따라 서예를 창작하게 된 것은 옹방강의 영향이다. 이는 옹방강
이 동파로부터 시론이나 서예론에 매우 큰 영향을 받았음에서 기인한다. 소동파와 미불의 글씨를
벽에 걸고서 그 방에 소미재(蘇米齋)하는 현판을 건 일이라든가, 송참본(宋?本, 송나라 판각본)
소시시고주(蘇詩施顧註)>31책을 구입하고서 그 책을 보관한 방에 보소실(寶蘇室)이라는 현액을 건
12) 이상 옹방강의 동파 중시 및 추사에 대한 동파 소개에 대한 내용은 日人 藤塚?,『淸朝文化東傳의 硏究』, 圖書刊行會,
昭和50年(1975), 東京, 85-96쪽 참조.  
13) 嘗聞之, 坡公曰: “論畵必形似, 見與兒童隣, 賦詩必此詩, 定知非詩人” 之公之書與畵而知公之詩亦由是也, 南秉吉 「覃?
齋(秋史)詩集序」 金正喜, 前揭書 7쪽 
9) “隨人作計終後人, 自成一家始逼眞” 黃庭堅,『山谷集』卷27,「題樂毅論後」, 文淵閣四庫全書 影印本, 商務印書館 113-290쪽 
14) ?世之才, 華國之手, 與文忠(東坡)同焉, 博聞多識, 名滿天下, 與文忠同焉, 書法之入神, 畵境之造妙者, 與文忠同焉, 蚤
10) ‘苟能通其意, 常謂不學可.’ 蘇軾,『蘇東坡全集』卷1, 河洛圖書出版社, 42쪽, 臺北. 
蒙天春歷揚華貫中惟竄荒裔而不以榮枯得喪介, 其靈臺超然. 獨立於物象表者, 一與文忠無異. 金寗漢 「阮堂先生全集序」,
11) ‘蘭亭雖是眞行書之宗, 然不必一筆一劃以爲準’ 黃庭堅, 上揭書, 290쪽 
金正喜, 前揭書, 3쪽 
120 ?
?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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