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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文)의 해석에 의심이 나면 반드시 생각하였고, 생각해서 터득하면 바로 기록하였고, 터
후에는 이병휴-이삼환으로 이어지는 덕산 장천리의 여주 이씨들이 성호 가학의 중심에 놓
득하지 못하면 나중에 다시 생각하여 반드시 터득해야만 그만두었다. 그러므로 『질서(疾
여있었다. 이들은 성호문집의 편찬을 주도하고 서암강학회를 여는가 하면, ‘장천의 구두’라
書)』 중에는 선유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뜻이 많았다.
는 학풍을 남기고 『양학변』의 저술을 통해 서학을 경계하기도 했다.
이익은 ‘초학자를 가르치는 방법은 먼저 그 구두를 바르게 떼도록 해야 한다.’ 하고, 규식
끝으로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조선조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요 금석학자이면
을 만들어 ‘구두지남(句讀指南)’이라 이름 짓고 학생들로 하여금 참고하여 글을 읽게 하였
서 훌륭한 서화가였다. 그의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 추사(秋史), 예당(禮堂), 시
다. 이익은 ‘구두를 뗄 수 있으면 뜻이 통한다.’ 하였다. 또한 성리학자들의 경서 강독 순서는
암(詩庵) 등으로 불리었는데, 경주김씨로 충남 예산 신암면 용궁리에서 이조판서 김노경(金
魯敬)과 기계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보통 『소학』-『대학』-『논어』-『맹자』-『중용』-『시경』-『서경』-『역경』의 순서인데 반해, 이익
의 경학 공부는 『맹자』-『대학』-『소학』-『논어』-『중용』-『근사록』-『심경』-『역경』-『서경』-
그는 북학파 실학의 거두 박제가(朴齊家)에게서 수학하였고, 2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설서
『시경』의 순서로 이루어졌다.
(說書), 검열을 거쳐 규장각 대교(待敎)가 되었다. 또한 충청도 암행어사로 일하기도 했고,
그런데 이삼환도 글을 가르칠 때 반드시 먼저 글의 이치를 열어 보여서 스스로 이를 터득
1836년(헌종 2)에는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으며 그 후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그는 일찍이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만약 이를 깨치지 못하면 하루 종일 마주 앉아 있었으며, 마침내 깨
24살 때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청나라에 가서 당대 최고의 석학인 옹방강(翁方綱)과 완원
치고 나면 다시 그 앞뒤의 말뜻을 따라서 거듭 이끌어 차근히 일러 주었다. 이 때문에 배우
(阮元)을 만나 평생 동안 학문 교류와 함께 국경을 초월한 학문 지도를 받았다. 그때 옹방강
는 자들 가운데 배움이 정숙하지 않은 자들이 없었으며, 한번 터득을 하고 나면 잊어버리는
은 77세요 완원은 46세로서 24세의 추사와는 나이로 보나 학문으로 보나 많은 차이가 있었
일이 없었다 한다. 이리하여 이남규는 당시에도 마을 서당에서는 이른바 ‘장천(長川)의 구
다. 그러나 추사는 귀국 후에도 계속 이들과 학문적으로 교류하였으며, 후일 옹방강은 추사
두(句讀)’라는 말이 전해온다 하였다. 이는 성호의 「구두지남(句讀指南)」이 이병휴를 거쳐
를 가리켜 ‘경술문장 해동제일(經術文章 海東第一)’이라고 극찬하였다. 추사 또한 이들 두
이삼환에게까지도 전해졌음을 말해준다.
석학을 평생 추앙하였고 그의 실학 사상 형성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만년에 이르러서 이삼환의 문하에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그래서 평소에 늘 효도와 공경,
그는 금석학의 대가로 함흥의 황초령비가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고증하였고, 또 북한산
예의와 염치로 순순히 타이르고 달래어 이끌어 주었으며, 밤이 깊어서야 비로소 물러가기
비봉에 있는 비석이 조선 태조 건국 시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임도 고
를 명하였다. 이런 까닭에 그의 문하에 있는 자들은 모두 행동거지가 볼만하였다 한다. 이삼
증하였다. 그는 경학, 사학, 시문, 금석, 고고, 서화에도 뛰어났던 대학자요 예술가로서 ‘추사
환은 서양의 천주학을 걱정하여 『양학변(洋學辨)』을 지어 원근에 이를 전해 보여주었다. 이
체’라는 독특한 서법을 창출하기도 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 다른 실학자들이 천주교에 심취
와 같이 여주 이씨들은 17세기 중엽 성호 이익의 숙부인 이명진이 용인이씨와 혼인을 하면
한 것과는 달리 불교에 관심을 가졌으며, 또한 경세치용이 아닌 북학파의 영향을 받아 실학
서 성호 가문이 내포의 덕산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내포의 덕산에 거주하는 여주
을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입장에서 전개하였다. 그는 1840년(헌종 6) 윤상도(尹尙度)의 옥
이씨들의 족보상 가계는 이해(李瀣), 이잠(李潛), 이서(李?), 이침(李沈) 등의 사손(嗣孫)
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에서 9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고, 1851년(철종 2) 다시 친우 영의정
들이지만, 혈통상의 가계는 모두 이하진의 넷째 아들로서 이명진의 양자로 입후한 이침(李
권돈인(權敦仁)의 예론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으나 그 다음 해에 풀려나기도
沈)의 혈손들이었다. 이들은 덕산의 장천리와 광주의 성호장, 한양 정릉의 구택을 왕래하면
하였다.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그의 제자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은 당시 역관
서 학문 연마와 과거 응시 및 종족 간 친목을 돈독히 하는 행사를 수시로 가졌다. 성호 가학
으로 사신을 따라 중국을 자주 왕래하면서 추사가 오랫동안 보고자 했던 청나라 계복(桂馥)
에서 덕산의 여주이씨 일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았다. 특히 부친을 잃은 이용휴와 이
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敬)의 『대운산방집(大雲山房集)』을 구하여 보내주었으며,
병휴는 숙부인 성호 이익이 이들을 돌보면서 40년간을 성호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성호 사
그 다음 해에는 청대 하장령(賀長齡)이 편집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篇)』을 북경에서
3.선비의고장,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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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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