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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본 단원들은 그 식민지성 농장에 분개하고 민족농장 건설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그리하여 1928년 6월
에 당시 일본 동경(東京)에 설치되어 있던 조선농우연맹(朝鮮農友聯盟)에 가입하고‘조선인에 의한 조선
농촌 개발’
이라는 주장에 합류하여 추진키로 했다. 그 해에 조선농우연맹이 국내에서 지방강연 등 계몽활
동을 할 때 수원고농의 학생도 연사로 참석하였는데 일제에 의해 강연활동이 중지되면서 여기에 연사로
참석했던 수원고농 학생 한전종(韓典鍾)은 학교에서 무기정학을 당했다. 이 때 건아단의 조직이 발각되지
는 않았으나 단원들은 사태를 중시하고 계림농흥사(鷄林農興社)로 명칭을 바꾸어 위장했다. 그런데 건아
단 출신으로 김해공립농업학교에 교사로 근무하던 김성원(金聲遠)이 건아단의 목적을 수행하던 중 일경
에 검거되었다. 그 때문에 1928년 여름에 계림농흥사는 다시 조선개척사(朝鮮開拓社)로 조직을 개편했으
나 사건이 확대됨에 따라 조직과 활동이 드러나게 되어 1928년 9월에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8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0년 3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면소판결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10] 드비즈, 에밀 피에르
Emile Pierre Devise
<1871~1933.8.31>
프랑스인 신부(神父)로 인주 공세리 성당의 토대를 마련했다. 세례명은
에밀리오(Emilio)이고 한국이름은 성일론(成一論)이다. 프랑스 남부 론
알프주의 아르데슈에서 태어났으며 1894년 사제 서품을 받고‘파리 외
방 전교회’소속의 선교사로서 중국을 거쳐 그 해(1894) 10월 25일 한국
에 들어왔다. 이듬해인 1895년 1월에 하우현 성당(경기도 의왕시 청계
동)에 부임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해(1895년) 6월에 공세
리 공소가 양촌성당(陽村, 당시 예산 고덕)에서 분리되어 공세리(貢稅里)
본당으로 설립되자 그가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서울 주교
관의 경리를 담당하는 당가(當家) 신부라는 중책을 맡게 되어 1년 만에
이임하게 된다. 1897년 6월에 제2대 주임신부인 기낭(Guinand, 한국명
<공세리 성당>
진보안陳普安)의 뒤를 이어 다시 제3대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이 후
1930년에 건강상의 이유로 퇴임할 때까지 35년간 주임신부로 재임하면
서 공세리 성당의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공세리 성당은 처음에는 마을에 사는 신자의 집을 개조해서 사용하다가 1897년에 공세곶창의 창고 자
리를 매입하여 헐고 그 자리에 (구)본당과 (구)사제관을 지었다. 그 후 신자수가 증가하면서 1919년부터
새 성당 건축을 추진하였다. 그가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지휘 감독하여 만 3년여 뒤인 1922년
10월 8일 현재의 본당 건물과 사제관을 완공했다. 이 두 건물은 매우 아름다움과 동시에 문화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00년에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144호로 등록되었다. 충청남도 지정 문화제 제145호인
합덕성당(1929)도 그가 설계한 것이다. 그는 60세 때 귓병으로 사목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공세리 성당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뒤에도 서울의 주교관에 머물면서 대구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 성당, 수원 성당,
혜화동 성당 종탑 건축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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