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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서재필 등과 함께 일본군 속에 숨어 도망한 뒤 1894년 3월까지 10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민씨정권은
이들을 대역죄인으로 규정하고 자객을 보내는 한편, 일본 정부에 이들의 송환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일
본은 이용 가치가 떨어진 그를 1886년 8월 태평양의 섬 오가사와라로 강제 추방하고 1888년 7월 홋카이
도 삿포로에 연금했다가 1890년에야 도쿄로 돌아오게 했다.
일본에 실망한 그는 청의 이홍장(李鴻章)과 담판할 생각으로 1894년 3월에 상하이[上海]로 건너갔으나
민씨정권이 보낸 자객 홍종우(洪鐘宇)에 의해 동화양행(同和洋行) 객실에서 암살되었다. 그의 시신은 한
강 양화진(楊花津)에서 능지처참되어 전국에 효시되었다. 1894년에 친일내각이 수립되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분위기 속에서 1895년에 사면·복권되었고 1910년(융희 4) 규장각 대제학으로 추증되
었다. 저서로《갑신일록(甲申日錄)》
등이 있으며 시호는 충달(忠達)이다.
한편 능지처참 당시 김옥균의 일본인 친구들이 그의 상투 등을 수습해서 일본 도쿄의 외국인 묘역에 묘
를 만들었다. 뒤에 일본의 도움을 받은 그의 양자 김영진이 1914년에 아산군수로 재직하면서 아산시 영인
면 아산리 영인산 자락에 그의 묘를 옮겨 조성한 뒤 지금까지 전해진다.
<김옥균 사진>
<김옥균 유허>
[9] 남영희
南榮熙
< 1905. 12. 30 ~ ? >
아산 음봉면 동천리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1926년 여름에 조직된 수원고등농림학교의 항일학생
결사 건아단(健兒團)에 참가해서 활동했다. 학교 기숙사내 한국인 학생 모임인‘조선인학생담화회’
를 중
심으로 결성되었던 건아단은 민족사회에 이바지하기 위해 농민대중을 계발하여 신사회 건설을 목적한 학
생결사였다. 그들은 먼저 농촌사회의 개발이 곧 독립운동의 기초가 된다고 보고 그들의 전문지식을 바탕
으로 농민을 계몽하고 지도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들은 수원군 안룡면(安龍面) 고견리(古牽里)를 비롯한
부근 여러 마을에 농민 야학을 설립하여 농민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활동을 전개하
였는데 이때 단군 연호를 사용한 것이 후일에 말썽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27년 9월에 북도(北道)지방을 수학여행하게 됐을 때 강원도 등지에서 일인의 대규모 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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