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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다시보기
서산의 봉수 (烽燧)
우리가 알고 있는 봉수시설은 봉과 수가 합쳐진 말이다. 봉(烽)은 불빛으로
밤에 수(燧)는 연기로 낮에 신호했던 통신체계이다. 문헌상에서 봉수제도가
처음 시작된 것은 중국 주나라 이후로 서주시기 견융의 침입에 대비 여산에 봉
화대와 대고를 설치하면서부터이다. 이후 한대에는 국가중요체계로서 봉수
제도가 엄격해지고 전시기에 비하여 정비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삼국사기』
『삼국유사』
를 통하여 확인 할 수 있는데,
가락국의 김수로왕이 횃불을 신호로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삼국
시대에 시작되어 본격적인 봉수제가 설치된 것은 고려 중기이다. 이후 고려시
학예연구사
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좀더 구체적인 봉수체계가 운영되는데, 북의 여진족,
남방의 왜구에 대한 방비로서 세종 28년(1446)사변에 신속히 대처할 수 있는
봉수법이 제정된다.
문헌상에 나오는 서산지역의 봉수시설을 살펴보면『세종실록지리지』
, 『신증동국여지승람』
, 『여지도서』
『동국여지지』
『호서읍지』
에는 북산봉수( 山烽燧)
, 도비산봉수(都飛山烽燧), 고구성산봉수(高丘城山烽
가 있다. 이들 유적은 현재도 형태가 남아있으며, 북산봉수는 최근 발굴조사를 하여 조선시대 만들어진
봉수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봉수유적들을 살펴보면 먼저 도비산봉수(都飛山烽燧)는 해발
340m의 도비산 정상부에 있는데, 정상부에 올라서면 사방을 한
눈에 관망하기 좋은 위치로 시계가 양호하다. 도비산봉수(都飛山
烽燧)는 고구성산봉수와 태안의 백화산봉수와 연결되는 신호
체계를 갖춘다. 봉수시설은 직경 약 10m 정도의 원형으로 약 2m
정도의 높이로 남아있다. 봉수대의 주변으로는 너비 50cm정도의
U자형의 호를 돌렸다. 주변의 봉수의 부속시설로 추정되는 창고와
같은 시설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데, 현재 기지국이 들어있어서
일정부분 유적이 훼손된 것으로 판단된다. 유적지 주변에서는 고려
(도비산 봉수대)
시대 토기편과 조선시대 기와편이 확인된다.
고구성산봉수(高丘城山烽燧)는 고북면 신송리에 있는 봉화산 정상부에 위치한다. 봉수지는 직경 6~7m
크기의 원형 웅덩이만 확인되는데, 봉수시설로 추정할 수 있다. 봉수의 주변에서는 봉수와 관련된 시설물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이 확인되며, 조선시대 기와편과 자기편이 확인된다. 고구성산봉수는 서쪽으로 도비
산봉수와 연결된다.
북산봉수( 山烽燧)는 1872년 만들어진 고지도에 표시될 만큼 봉수 본연의 기능을 간직한 채 오랫동안
01) 조선시대 발간된 각종 지리지에는 북산봉수와 주산봉수로 표현되어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과『東國輿地志』
에는 북산
봉수로『世宗實 地理志』
『輿地圖書』
『湖西邑誌』
에는 주산봉수로 표기되어 있다.
02) 고구성산봉수는 원래 홍주목 관할이었으며, 해미안국산 봉수는 지금의 당진군 정미면에 있는 봉수로 현재 관할구역에 있는
봉수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2011_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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