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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68세 공문백(孔文伯)이 신양리로 이주하였고 공용수씨의 9대조인 68세(世) 공문창(孔文昌)이 배
방 장재리로 이주하였다. 공문창의 아들 공준흥(孔俊興)이 다시 음봉면 신수리로 옮겨 4대를 이어 살
다가 74세(世) 공이상(孔履祥, 1825~?)이 득산동에 자리 잡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공부의 후손은 현재 둔포면 신양리와 산전리, 득산동을 중심으로 각지에 퍼져 살고 있다.
[5] 현풍곽씨 곽금정
| 郭今貞
<1491년(성종22년)~1550년(명종5년)>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현풍곽씨(玄風郭氏) 18세이며 전리공파 중 진사공파 아산시 지역, 배방읍 북
수리 입향조이다. 선대는 경기도에 살다가 전남 강진에서 4대를 살았다. 현재 배방읍 세출리 낭골에
사는 후손 33세(世) 곽호진(郭鎬震, 83세)씨의 15대조이다.
그는 진사공파 파조인 진사 곽신민(郭新民)의 5세손이다. 고조는 보문각 제학을 지낸 곽자시(郭自
始)이고 증조는 봉열대부 곽하(郭賀)이며 조부는 직장(直長)을 역임한 곽우신(郭又新)이다. 아버지는
승훈랑 곽보(郭保, 1474~1531)이고 어머니는 삼척진씨(三陟秦氏)로 현감 진예안(秦禮安)의 딸이다.
곽금정의 자는 원로(元老)이고 병절교위(종6품)에 올랐다. 부인은 중모박씨(中牟朴氏)이고 참봉 박
사발(朴斯發)의 딸이다.
그가 언제 어떤 연유로 배방 북수리로 들어왔는지 알 수 없다. 그와 아버지의 묘가 북수리 왜리 마
을에 있다. 집안에서는 그의 아버지인 곽보부터 시제를 올린다. 그러나 집안의 기록에 곽금정이‘이
거온양(移居溫陽)’
했다고 명확히 하고 있으므로 그가 연로한 아버지를 모시고 왔거나 돌아가신 뒤
묘를 모신 것으로 보인다. 시기는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때(1531년)를 기준으로 하여 약480년 전으
로 추정한다.
곽금정은 숭(崇)과 영(嶺) 등 2남1녀를 두었는데 둘째는 후사가 없다. 곽숭이 외아들 충후(忠厚)를
낳았고 곽충후도 역시 아들 형(逈) 하나만을 두었으나 곽형이 두 아들 안국(安國)과 안정(安鼎)을 둔
이후부터 점차로 후손이 늘게 되었다.
현재는 배방읍 북수리와 공수리를 중심으로 세출리, 천안의 수신과 풍세 등 각지에 후손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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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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