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58페이지

12페이지 본문시작

로 고대에는 백제의 멸망을 가져온 나당연합군과의 전투 현장으로서 근대에는 청 일전쟁의
시발로 왜세에 의해 전쟁터가 되는 등 우리 민족의 과거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
이기도 하다
삼도해운 판관비
이 판관비는 인주면 공세리의 아산 공세곶창이 있었던 옛 창사앞 도로변에 위치 하였으며
비는 모두 9기 인데 그동안 마을 도로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한 자리에 모아 놓은 것으로
그중 3개는 현감의 선정비이며 나머지6기는 해운 판관비인데 가장 오래된 것이 순치 6년
(1649)이고 최근 것으로는 강희47년(1708)이다. 이 비는 조선 중종 18년(1523)에 창고 80간을
건축하고 조세를 거두어 보관하였다가 서울로 운송키위해 이곳에 주재한 삼도 (충청, 전라,
경상)해운판관의 청덕 기념비이다.
8)
풍습 및 집단행사
이 고장에서는 여러 가지의 계가 존재하지만 모두사라지고, 쌀계 하나만 존재한다. 그러나
위찬계는 자기부락에 초상이 생기면 손과 발을 걷어 부치고 많은 일을 자기 일처럼 도와주
는 혼인계가 있는데 누가 결혼을 하면 서슴없이 도와준다고 한다.
9)
특별히 소개 할만한 인물
최익수
독립운동가 호는 일청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 215번지에서 출생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20세에 청운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가 수학하던중 대부분
유학생들이 점차로 항일 독립사상이 싹트기 시작함과 동시에 그는 3.1 독립운동에 가담, 재
일 유학생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일제와 싸워 나라를 찾는데 몸과 마음
을 바치겠다는 결심으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의 길을 터난 그는 그곳에서 충남대
표의 책임을 맡고 군자금 모금의 사명을 띠었다. 본국으로 돌아와 대지주를 상대로 일제의
감시를 피해 모금운동을 벌였으나 어려움이 대단히 많았다. 이때 아산 금융 조합에 근무하
던 사촌처남 진수린을 설득하여 아산군 금융조합 금고의 현금을 손에 넣는데 성공하여 상해
로 떠났는데 이때가 1921년 이었다. 그는 상해에서 계속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재차 군자
금 모금을 위해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왜경의 수배인물로 올라있는 그는 아산군 인주
면 공세리 자기집에 숨어서 약 반년을 은거하던중 어느날 왜경이 이 사실을 눈치채고 집 주
위를 포위하고 체포 하려는 순간 기적으로 빠져나와 서울로 피신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서
울에서 최석창이라는 동지를 포섭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동행 하였다.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다시 본국으로 돌아오던중 신의주에서 왜경에게 체포 되고 말았다. 왜경은 심한 고
문으로 그의 자백을 받으려 했으나 그는 끝까지 자백하지 않아서 동료 독립투사들의 희생을
모면할수 있었다. 그런 후 종로 경찰서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취조를 받고 공주지방검찰청으
로 이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공주지방법원에서 그는 3년 징역에 10년 집행유해 언도를 받았다. 8.15해방후 과거의 친구이
자 동지였던 조병옥 박사외에 여러 친구들이 정계에 진출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혼탁한 정치
풍조에 실망한 그는 끝까지 사양하고 초야에 묻히어 청념결백하게 여생을 보냈으며 한때 정
부 당국의 권고에 따라 방위군 간부직을 잠시 맡은바 있었다. 1964년3월 25일 병으로 서거
했다.
묘소는 고향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에 있다.
10)
종교단체
기독교 대한 침례 교회 - 공세 침례교회
불교 조계종 - 고성사
천주교 - 공세 천주교회
11)
공장현황
곡물제분업 업체인 - (주)우리밀 , 가금도살업 - (주)삼척 농수산회사
12)
마을변천과정
아산만 방조제 건설 공사로 마을에 많은 발전이 있었으며 마을의 특산물은 대파와 마늘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

12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