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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던 종족 간의 친목 활동이 성호가 죽은 후에는 점차 그 중심지가 덕산으로 옮겨진 것이다.
교에 대한 탄압을 계속했다. 뒤에 파직되어 다시 천주교에 대한 연구를 계속, 마침내 신자가
덕산에서 태어난 이용휴와 이병휴(1711~1776)는 이익을 40년간 스승으로 모시면서 가
되고 종교 운동에 헌신하다가,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이승훈, 권철신 등과 함께 체포
르침을 받았다. 이남규(李南珪)는 옥동 이서(玉洞 李?)와 성호 이익 두 분 선생께서는 사
되어 순교했다. 정조로부터 ‘정학사(貞學士)’라 호칭될 만큼 대학자였으며, 특히 천문학과
도(斯道)를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는데, 당시 그 문하에 모여든 많은 선비들과 여러 자질(子
수학에 정통하여 그 자신이 “내가 죽으면 이 나라에 수학의 맥이 끊어지겠다.”라고 할 만큼
姪) 중에 그 경(經)과 예(禮)를 전수받아서 사과(四科)의 과목에 넉넉히 들 수 있는 자로는
수학의 대가였다. 저서로는 『금대유고(錦帶遺稿)』가 있다.
정산 이병휴(貞山 李秉休)를 꼽을 수 있다 하였다. 이병휴는 성호 사후에 그의 가장(家狀)
또한 다산 정약용이 금정찰방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이루어진 ‘서암강학회(西巖講學會)’
과 묘지문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성호의 유고 정리와 문집 편찬을 주도하였다. 그는 성호
를 통해 예산, 아산 지역의 실학 활동을 볼 수 있다. 이 서암강학회의 주도자는 가장 연장자
를 사사하다가 그가 죽은 후 소남 윤동규(邵南 尹東奎)를 스승으로 삼고 그의 문하에서 배
였던 이삼환(李森煥)이었다. 1795년(정조 19) 10월 24일에 정약용은 금정(金井)을 출발하
웠는데, 하빈 신후담(河濱 愼後聃), 순암 안정복(順庵 安鼎福) 등과 교유하였다. 그의 자질
여 먼저 예산의 감사(坎舍)에 도착하여 미리 도착해 있던 이삼환을 만나 하루를 머물며 학
(子姪)로는 가환(家煥), 삼환(森煥), 구환(九煥) 등 재종형제가 있어 빛을 발하고, 문인으로
문을 논하고, 26일 저녁에 온양 서암(西巖)의 봉곡사(鳳谷寺)에 도착하였으며, 27일에는
는 이기양(李基讓), 권철신(權哲身) 등이 있었다. 이병휴가 지은 『성호전집』 발문에서 그는
이삼환이 도착했다. 온양의 서쪽에 있는 봉곡은 덕산으로부터는 동쪽으로 30여 ㎞ 정도의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벌써 10년인데 유집(遺集)을 아직까지 탈고하지 못하였으므로, 내
거리이다. 남쪽은 광덕산, 서쪽은 천방산이 있어서 첩첩으로 둘러싸인 높은 봉우리와 울창
가 두려운 마음이 들어 서둘러 원고를 가져다가 문체별로 나누어 선사(繕寫)하고 쉬지 않고
한 숲,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곳으로, 당시 10월 하순이지만 이른 눈이 내려 한자나 쌓여 있
교정하여 1772년(영조 48) 여름부터 시작하여 1774년 가을에 끝마쳤는데, 모두 70권으로
었다 한다. 가까운 고을에 있는 여러 사우(士友)들이 차례로 모여들어 성호의 유서(遺書)를
만들어 가숙(家塾)에 보관한다.”고 하였다. 이 문집의 편찬이 주로 덕산에서 이루어졌다.
교정하였는데, 먼저 『가례질서(家禮疾書)』를 가지고 그 범례를 정하였다. 정약용의 기록에
이서(李?: 1662~1723)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창시자로 호는 옥동(玉洞)인데, 계씨
의하면,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여러 친구들과 함께 시냇가에 나가서 얼음을 깨고 샘물을 떠
인 성호 이익에게 예산 지방의 실학풍을 이어준 학자다. 중제(仲弟) 침(沈)이 계부(季父) 명
서 세수하고 양치질을 하였으며, 낮에는 여러 친구들과 『질서(疾書)』를 정서하였는데, 목재
진(明鎭)에게 양자를 가서 예산군 고덕면 지곡리에 살게 되면서부터다. 그의 서체는 윤두서
가 직접 교정을 하였다. 저녁에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산언덕에 올라 소요하면서 풍경을 바
(尹斗緖), 윤순(尹淳), 이광사(李匡師) 등이 이어받았다.
라보았는데, 연기와 구름이 섞여진 산의 기운이 더욱 아름다웠다 한다. 밤에는 여러 친구들
이가환(李家煥: 1742~1800)의 자는 정조(廷藻), 호는 금대(錦帶), 정헌(貞軒)이고, 이익
과 학문과 도리를 강론하였다. 때로는 이삼환이 질문하고 여러 사람들이 대답하기도 하고,
의 종손(從孫)이며 용휴의 아들이며 이승훈(李承薰)의 외숙이다. 그의 학문적 교우로는 정
때로는 여러 사람들이 질문하고 이삼환이 변론을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10일이
약용(丁若鏞), 이벽(李蘗), 권철신(權哲身) 등 초기 기독교인들이 많다.
나 하였으며, 11월 초 5일에 하산할 때에 함께 내려왔다. 이때 함께 했던 인물들로는 덕산
1771년(영조 47) 진사가 되었고, 1777년(정조 1) 증광문과 음과에 급제하였으며, 1780
의 이삼환, 예산의 이광교(李廣敎), 덕산의 이재위(李載威), 덕산의 박효긍(朴孝兢), 강세
년 비인현감이 되었다. 1784년(정조 8) 숙부 이승훈이 북경에서 돌아오자 천주교에 흥미
구(姜世龜)의 현손인 강이인(姜履寅), 서산의 이유석(李儒錫), 예산의 심로(沈潞), 정약용,
를 갖고 이벽 등과 함께 교리를 번역 연구했으나 입교는 하지 않았다. 그 후 천주교가 박해
공주의 오국진(吳國鎭), 강이인의 재종제 강이중(姜履中), 권기(權夔), 온양의 강이오(姜履
五), 덕산의 이명환(李明煥) 등이었다.
를 당하자 교리 연구를 중단했고,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 때는 광주부윤으로 자신이 천
주교를 탄압하기도 했다. 그 후 대사성, 개성부유수, 형조판서를 지내고 1795년(정조 19) 주
덕산의 성호가학은 자득과 실천을 강조한 성호의 교육 방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었다.
문모 신부의 밀입국 사건으로 반대당의 모함을 받아 충주목사로 좌천되어 그곳에서도 천주
이익의 학문은 기존의 학설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자득하려고 애썼다. 경문
3.선비의고장,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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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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