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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했다. 그는 6남매의 자녀를 두었고 해방 후에는 화성군 대한부인회 회장을 맡는 등 수원 일대에서 계몽
활동과 생활 개선 운동을 계속했다.
[7] 김양순
金良順
< 1881.12. 9~1936. 1. 3 >
아산 신창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1919년 4월 2일에 당시 아산군 학성면(鶴城面:현 신창면) 학
성산(鶴城山) 위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 3월 31일 밤에 탕정면(湯井面)·염치면(鹽峙面)·
배방면(俳芳面) 및 송악면(松岳面) 등지에서, 그리고 4월 1일 밤에는 온양면(溫陽面)과 둔포면(屯浦面)에
서 횃불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이에 고무된 학성면에서도 만세시위를 추진하게 되었다. 그는 이덕균(李悳
均) 등과 함께 학성면의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4월 2일 오후 8시 경에 학성산 위에서 동내 주민 200여 명
을 모아 놓고 횃불을 올리며 대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면소재지까지 시위행진을 벌인 뒤 면사무
소·주재소·보통학교 등 각지를 돌며 돌을 던져 유리창과 문짝 등을 부수었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6
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는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
훈을 기려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8] 김옥균
金玉均
< 1851(철종 2년) ~1894(고종 31년). 3. 28 >
충남 공주 정안 출신의 조선말 개화기 정치가이자 개화운동가이다. 본관은 안동이다. 자는 백온(伯溫)이
며 호는 고균(古筠)·고우(古愚)이고 별호는 두타거사(頭陀居士)다. 생부는 병태(炳台)이고 모친은 송씨인
데 7세 때 천안에 사는 당숙 병기(炳基)에게 입양되었고 서울에서 성장했다. 11세 때 병기가 강릉부사로
가게 되자 그곳에 가서 16세까지 율곡 학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공부했다. 1872년(고종 9) 알성문과에 장
원급제하고 전적을 거쳐 1874년 교리·정언을 지냈다. 이 무렵 그는 개화통상론자이며 정계의 거물이었
던 박규수(朴珪壽)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유대치(劉大致)·오경석(吳慶錫) 등의 지도를 받고 박영효(朴
泳孝)·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 등과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개화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1876년 개
항을 계기로 정부의 개화정책에 적극 참여하여 통리기무아문 설치 등 정부기구 개편, 군제 개혁, 박문국
설치와 한성순보 간행 등에 주요 역할을 했다. 1881년(고종 18)에 일본을 시찰하고 다음 해 다시 수신사
(修信使) 박영효(朴泳孝) 일행의 고문으로 일본을 다녀온 후 일본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해서 조선의 근대
화를 추진하기로 했다. 그 사이에 임오군란(1882)이 일어나 청의 내정 간섭과 민영익(閔泳翊) 등 민씨정
권의 친청사대정책이 강화되는 한편, 자금 부족 등으로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주도권이 약화되자 일본과
결탁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준공 축하연에서 민씨 일파의 대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고종의 재
가를 받아 청과의 전통적 관계를 단절하고 근대적 국가 수립을 추진하는 한편 문벌·신분제의 폐지를 통
한 인민평등 실현 등 근대 부르주아 혁명을 지향했던 급진개화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청군의 강력한 개입
과 일본의 배신, 민중의 지지 유도 실패 등으로 이른바‘3일 천하’
로 끝나게 되었다. 그는 박영효·서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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