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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일본어 아산군지
.(제
스에 부탁 미국에서 외채 모집의 일을 꾸몄지만 이 일은 성사가 안됐다
(澁澤榮一)가 김옥균에 100,000내지 200,000원을 빌려주려
일은행의 삽택영일
(井上)의 승낙을 얻지 못하여 중지됐지만……. 1884년
고 했지만 외무경 정상
1월경) 1884년 빈손으로 귀국하였다. 위 일을 주선하는 중 일본 정부가 조선
, 그리하여 김옥균의
에 대하는 정략을 보건데 되려 후퇴한 주의로 보이며
거동 하나하나가 일본정부의 뜻에 드는 것이 없고 김옥균 박영효의 이름만
, 외무성 같은 곳에도 들어갈 수
들어도 경거망동하는 부량자 같이 경시하며
. 일본에서 이러하니 재 조선의 일본공사관에서도 같았다. 당시 귀경
가 없다
(竹添氏) 같은 이는 김, 박과 절교 상태에 있었으며
중인 조선 공사의 죽첨씨
당시 재임의 대리공사 도촌씨이하 공사관의 직원들도 보조를 같이 하였다
3월로서, 그 후 주의하여 공사관의 동태
그러한데 김옥균씨가 귀국한 것은
8, 9월경부터 상태가 이상한 것을 느껴 서서히 접근하려
를 살폈든바 본년
. 정상각오랑(井上角五郞)는 원래 김옥균, 박영효 등과 조선에
고 마음먹었다
건너와 그후 그 정부에 고용되어 한성순보에서 집필하였다
(支那人)을 비난하는 자가 많고 또한 조선 정
올 해 이른 봄부터 중국사람
, 하나는 신변의 보호, 하나는 생활
부로부터 급여되는 봉급이 몹시 적으므로
(島村)씨에게 청원했지만 들은체도 하지 않았다.
의 보호를 본 대리공사 도촌
, 일본인은 각오랑(角五郞)을, 김, 박과 동일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이리
다분
(角五郞)은 5월 경성을 떠나 귀경하였다. 이때 청불전쟁이 막 일
하여 각오랑
. 7월에 이르러 세인은 이 전쟁이 피할 수 없음을
어나려고 하는 상황이였다
, 외무성에서는 각오랑(角五郞)에게 약간의 보호금을 주어 다시 건
알게 되고
너오게 하였다
(支那人)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데
그 큰 목적은 한성순보를 중국사람
. 각오랑(角五郞)이 다시 건너온 것은 8월 중순으로서 이때 도촌씨(島村
있다
)는 조선정부와 일한무역 장정 결에 요구하는데 열중하고 있던 중이었지
만 조선정부는 이를 듣지 않았다
이때 일본 공사관에서 한규직 이조연과 친하고 일본인은 일본당이라 칭
, 박과 친하지 않았다. 그러나 각오랑(角五郞) 재래를 전후
하였지만 아직 김
(島村)씨와 김, 박 친하여 무역협정 체결의 담판에 대하여도 그 상
하여 도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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