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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는 전주이씨로 판관 이빈국(李賓國)의 딸이다.
임희지의 자는 일소(逸少)이다. 한양에서 출생하고 거주했으나 부친이 왜란 중이던 1594년에 병으
로 아산 사기소에서 졸하자 묘소를 아산 염치 동정리(독정이)에 모시고 3년 시묘를 하면서 인근 대실
(죽실) 마을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다. 이후 후손들이 인근 마을에 살게 되었다. 부인은 원주원씨
(原州元氏)로 군수 원경심(元景諶)의 딸과 해주오씨(海州吳氏)이다.
그는 1591년(선조24)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4년(선조 37)에 평강현감(平康縣監), 1607년(선조
40)에 감찰에 제수되었다. 1617년(광해군 9)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사예(司藝-정4품) 겸 춘
추관 편수관을 지내던 중에 북인(北人) 주도로 인목대비 폐출이 추진되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온 뒤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70세에 졸했다.
조부인 임내신(任
臣)의 농장이 천안 방축동(쌍용 2동)에 있었는데 그는 임진왜란 중에 곡식
1,000여 석(섬)을 내어 군량미와 구호미로 쓰도록 했다. 특히 농장 인근 길가에 큰 솥 10여 개를 걸
어놓고 죽을 쑤어 난민을 구호했다고 전한다. 선무원종공신 3등에 책훈되었고 후에 이조참판 홍문관
제학에 추증되었다. 묘는 천안시 풍세면 구룡리 배골에 있다.
임희지는 환(
)과 준(晙) 등 아들을 두었다. 임환(任
)은 아들 임홍망(任弘望)이 지중추부사에 이르고 명
성이 있어서 참찬에 증직되었다. 임준은 절충장군에
올랐고 아들 임홍량(任弘亮)은 목사에 오르고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또한 증손 강개옹 임창(任敞)과 현손 서재 임징하(任
徵夏) 등이 의리로써 이름을 알렸고 9세손 고산 임헌회
(任憲晦)는 조선 말기에 학자로서 이름이 높았으며 선
조들을 모시는 독성서사를 건립하였으며 최근에 독성
서원으로 중건되었다.
임희지의 후손들은 염치읍 쌍죽리와 동정리를 중심
으로 온양, 배방, 천안 풍세, 연기 전의 등에 거주하고
있다.
-독성서원 현판과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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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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