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80페이지

119페이지 본문시작

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아 1년 6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
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5] 김금복
金今福
< 1899. 9. 12 ~ 1955. 4. 24 >
아산 사람으로 3.1운동에 참여한 독립 운동 유공자이다. 일명 김명준(金明俊)이다. 1919년 4월 2일 밤
신창 학성산(鶴城山)에 올라가서 봉화를 올리며 이덕복(李悳福) 등과 같이 주민 다수를 규합하여 독립만
세시위를 주도했다. 이어서 신창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 신창보통학교 등을 차례로 습격하여 시설물과
기물을 파손하며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그해 6월 2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항소했
으나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또한 9월 6일 고등법원에 상고했지만 또 기각되고 형이 확
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
을 추서하였다.
[6] 김복희
金福姬
< 1901 ~ 1986 >
아산 염치 백암리 출신으로 3.1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일명 김복술(金福述)이다. 부친은 김윤필이고 모
친은 박씨이다. 당시 아산 지역 최초(1901년)의 개신교 교회인 백암감리교회가 인천 지주 장지순의 마름
으로 백암리에 왔던 평신도 최봉현에 의해 민가를 빌려 세워졌다. 김복희는 그 교회에 부설된 영신보통학
교에 들어가 이른바 신학문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4학년 때에 공주에서 순행 온 미국인 여자 선교사 사애
리시<史愛理施, 샤프(R.A.Sharp) 목사의 부인. 본명은 Alice J. Hammond>의 눈에 띄어 그녀의 추천으
로 서울에 있는 이화보통학교 4학년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후 이화고등보통학교 1회 입학생으로 들어
가 1919년 3월에 졸업하였다.
3.1운동이 시작되자 일제가 휴교령을 내리고 교사와 학생들을 붙잡아 갔고 그는 고향으로 내려왔다. 당
시 영신학교 교사로 있던 대구 출신의 한연순(당시 만22세)과 전부터 친교가 있었기에 함께 만세운동을
추진하기로 하고 마을 유지들과 함께 준비하게 되었다. 마침내 3월 31일에 그는 마을 분들에게 저녁 식사
후 횃불을 들고 마을 뒷산에 모이도록 했다. 약 50명 정도의 주민들이 산꼭대기에 모닥불을 놓고(봉화 시
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여자는 둘 뿐이었다. 한참 뒤 온양온천에 있던 12대(헌병대)가 출동
해서 총을 쏘며 올라와 주민들을 체포하고 해산하였다. 이때 그와 한연순은 피해 달아나다 다쳐서 한연순
은 서울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지고 그는 외숙모 집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가 결국 모두 체포되어 공주
감옥에 투옥되었다. 당시 유관순도 함께 공주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다. 재판 끝에 그는 징역 2개월, 한연
순은 징역 3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공주 감옥에 수감되었다. 조사과정까지 포함하여 약 1년 정도의 감옥생
활을 했다.
출옥 후 이화여자전문학교 보육과에 진학했고 졸업 후 사애리시 선교사의 부탁을 받고 강경 만통 여학
교의 유치원, 공주 영명 여학교 유치원 등에서 시간 교사로 근무했다. 1925년 전재풍 목사와 결혼하고 강
원도로 이주한 뒤에도 계속해서 유치원이나 탁아소 운영 등 유아 교육과 농촌 계몽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
118

119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