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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인근 고을로 이관 시켜버렸다. 그러나 조극선의 치밀한 사실 조사는 인근 고을의 조
마시던 술까지 끊는 과단성을 보이며 향학열을 불태웠다. 그는 경사(經史)를 비롯하여 성
사관을 함구케 했고, 진씨는 끝내 처벌당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조극선은 그해 여름
리학, 예학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예학이었다.
의 고과에서 ‘중(中)’을 받는 수모를 당했다. 또한 1657년(효종 8) 사헌부 장령으로 있을 때
그의 예학은 『야곡집(冶谷集)』에 수록된 서간, 1626년(인조 4) 계운궁 상례시 인조의 복제
인조의 형 능원대군(綾原大君)의 아들인 영풍군(靈豊君) 이식(李湜)이 적모(嫡母)에게 불
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한 「예설참의(禮說僭擬)」, 사우간에 예를 문답한 『의례문답(疑
禮問答)』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예설참의』는 계운궁 상례시 인조의 복제에 관한 자신
효하다는 추문이 돌았다. 이식은 효종과는 4촌 간이었지만 추호의 고려도 없이 삭탈관직을
건의하여 관철시켰다.
의 견해를 제시한 것인데, 반정으로 임금이 된 인조가 생모를 위해 어떤 복을 입어야 하는가
조극선은 또 교화를 숭상하고 사풍(士風)을 돈독하게 하는 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순창
의 문제였다. 조극선은 인조가 조정의 여론에 떠밀려 장기복을 입은 것은 올바르지 못한 예
군수 재직 시 순창은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한 고을이었으나 백성들의 습속은 다투기를 좋
의 적용으로 보고, 박지계와 마찬가지로 3년 복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의례』에 이론적 근
아하여 예로부터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정평이 나 있었다. 조극선은 향풍의 교화를 위해
거를 둔 것이었다. 이것은 왕조례(王朝禮)와 사대부례(士大夫禮)를 구별하지 않는 예의 보
그 해법으로 향약의 시행을 비롯한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였다. 양로연(養老宴)을 열어 노인
편성을 강조한 데 특징이 있고, 이러한 예 인식은 원종추숭론(元宗追崇論)의 이론적 근거
을 우대하는 문화를 가르쳤고, 효우(孝友)와 절의를 행한 자는 직접 방문하여 음식을 대접
가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박지계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했으며, 병들고 노쇠하여 양로연에 올 수 없는 자에게는 문안의 편지를 보내기까지 하였다.
5)실학파
또 상을 당한 향리에게는 휴가를 주어 3년상을 마치도록 하고, 음사(淫祀)는 철저히 금지시
켰으며, 간사하고 거짓된 행위는 원천 차단하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순창의 풍속은 변화
하였고 사방으로 전파되었다.
조선 후기 덕산에는 성호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이익의 조카와 그 후손들이 많이 거주하
조극선의 학문은 무실(務實)학풍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그는 진실한 마음과
였다. 성호의 가문인 여주이씨의 덕산 거주는 이익의 숙부인 이명진(李明鎭)이 이전부터 덕
공부에 대한 각고의 노력을 강조하였다. 그는 스승인 이명준, 박지계, 조익의 학풍을 계승하
산의 유력한 세력으로 살아 온 용인이씨 이갑준의 딸과 혼인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명진
고 있는데, 이는 우계의 무실학풍에 연원하는 것이다. 그가 1609년(광해군 1)부터 3년간 작
은 아들이 없어 이익의 친형인 이침(李沈)이 그의 양자로 들어가 후사를 이었으므로, 이후
성한 일록(日錄)은 일상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을 야사 형식을 빌어 기술한 것으로, 부
덕산 지역은 이침의 직계 혈손들이 거주하는 터전이 되었다. 덕산 지역에 거주한 여주이씨
모에 대한 효, 임금에 대한 충, 스승에 대한 경을 행신(行身)의 3대 지표로 설정하여 그 실천
들을 족보를 통해 살펴보면, 이광휴계, 이병휴계, 이용휴계, 이정환계 등으로 나타나지만,
여부를 매일매일 점검하였다. 24세 되던 해인 1618년(광해군 10) 「자경잠(自警箴)」을 지어
이는 여주이씨 집안에서 끊어진 후사를 잇기 위해 잦은 출계 입양이 이루어진 결과가 반영
공맹(孔孟)에서 정주(程朱)로 이어지는 유학의 참뜻을 되뇌이며, 자기 완성을 기하는 학문,
된 것이고, 실제로는 모두 이침의 직계 혈손들이다.
실천하는 학자로 거듭나기 위해 애를 썼고, 그 이듬해 새해 아침에 지은 「원조잠(元朝箴)」
이명진(李明鎭: 1641~1696)은 1694년부터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 여주이씨가 정착하
에는 구태를 벗고 날로 새로워지는 자아를 향한 열망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밖에도 경전 가
였는데, 경기도 안산에서 처음 이주한 낙향조가 이명진이다. 이명진이 후손이 없어 그의 형
운데 수신과 마음가짐의 요법이 되는 것을 초록한 「폄기요결(?己要訣)」이나 우리나라 선
이하진(李夏鎭)의 4남 침(沈)을 양자로 받아들였고, 그의 후손이 예산에 살면서 성호의 실
현들의 좋은 언행을 가려 적은 「상목편(常目編)」의 저술도 이런 정신의 연장이었다. 이 점
학을 가학으로 받아들여 예산 실학이 형성되었다. 이명진의 양자가 침(沈), 침의 아들이 용
에서 조극선의 학문적 생애는 스스로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 계발의 과정이었고, 그것의 궁
휴(用休), 용휴의 아들이 가환(家煥)이다. 이익이 죽은 후 성호 가학의 중심은 경기도의 광
극적 지향은 실천하는 유자, 즉 진유(眞儒)였다. 이를 위해 그는 20대 중반에는 평소 즐겨
주(현 안산)에서 덕산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성호 생존시에는 안산과 덕산을 오가며 이루어
3.선비의고장,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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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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