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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일본어 아산군지
의하여 십칠만원을 차관할 것을 약속하고 박영효와 더불어 귀국하였다
(나) 김옥균의 재유
170,000원의 차관을 얻은 것은 그 차관
이러하듯 김옥균은 우리나라부터
은 국정개혁을 수행할 비용으로서는 너무나 적은 액수이다
1883년의 여름 김옥균은 서재필, 서재창과 같이 호산(戶山)학교에
다음해
17, 8명을 이끌고 조선의 광산을 담보로 하여 3,000,000의 차
입학한 유학생
관문제를 들고 다시 쾌유하였다
그러나 당시 우리 정부의 대한 책은 항상 소극적이어서 자칫하면 청국과
갈등이 생길까봐 끓이고 있든 바 더구나 차관문제는 달갑지 않을뿐더러 변
(辨理公使竹添進一郞) 같은 사람은 그 성공을 방해하고자
리공사죽첨진일랑
. 김옥균 크게 실망하여 재야의 유력인사에게 부탁
그 위임장을 부인하였다
. 사정을 말하고 복택유길(福澤諭吉)에 청
하여 이를 원조를 구하고자 하였다
. 복택(福澤)은 그의 친지백작 후등상차랑(後藤象次郞)에 소개하였다.
하였다
이 사이에 그는 한편 미국인 모루스에 부탁 미국부터 차관할 뜻을 세우고
. 그리하여 옥균은 후등(後藤)에 원조를 바랬으며 후등(後藤)
있었는 듯 했다
역시 옥균의 희망을 받아들여 청불 양국의 개전을 계기로 불국공사 윅끼 밀
상하여 불국을 도와 청국을 쳐 조선을 구하고 평생의 난국을 펼치고자 하였
. 그러나 그 밀의가 아직 있기 전에 옥균은 급속히 귀국해야 하는 사정이
일어났다
(後藤)는 육오종광(陸奧宗光)과 도모하는 바 있었다. 육오(陸奧) 3,000,000
후등
200,000원을 조달하여 목하의 급한데
원은 급히 조달하기 어려워 급한대로
. 그러나 조선왕국부터 그 정권을 후등(後藤)에게 위탁한다는
쓰도록 하였다
, 후등(後藤)으로 하여금 그 땅에 가도록 하고 또한 군사상의 일
국서를 얻어
(岡本柳之助)에게 맡도록 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에
에 대하여는 강본유지조
(古田正春) 글을 쓰고 육오(陸奧) 이를 수정 다시 복택(福澤)
대해 고전정춘
(斧正)을 거쳐 아주 세밀한 위임장의 초안이 되었다. 당시 후등(後
의 부정
)의 결심은 완강하여 의기팔도를 삼키고 남을 기개였다. 그는 복택(福澤)
에게 말하기를 ?왕명을 받들어 왕도에 들어가 천하의 대사를 결행함은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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