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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현은 그에게 병부(兵符)의 의미를 갖는 도장(최익현의
성명이 새겨짐)과 격문 등을 주며 스스로 창의(倡義-의
병을 일으킴)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그 해 5월에
의병을 일으켜 민종식이 주도했던 홍주성 전투에 돌격
장(突擊將)으로 참여하여 홍주성 점령에 공을 세웠다.
이어서 의병을 모집하는 소모장(召募將)에 임명되었지
만 곧 일제의 공격으로 결국 홍주 의병이 패퇴했다. 면
암의 순창 의병도 무너진 상황이어서 그는 예산 지역에
서 다시 의병을 준비하다 10월 초에 일진회원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공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된 뒤 재판을 거쳐
<곽한일의 묘>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
던 중 다음해인 1907년 7월에 종신유배형으로 감형되어 전남 신안의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가 1912년
에 풀려나 귀향하였다.
고종은 1913년에 그에게 비밀리에 의대조(衣帶詔-임금이 허리띠나 옷에 써서 내린 왕명)를 내려 독립의
군부 총무총장에 임명했다. 그는 다시 창의하기 위해 아산에는 태극서원(太極書院)을 두고 안성에는 태극
약국(太極藥局)을 두어 인재와 군자금을 모으던 중 1914년에 발각되어 다시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1916년에 종신 집행유예로 바뀌어 집으로 돌아온 뒤 칩거 생활을 하다가 1936년에 향년 68세로 세상을
떴다.
묘소는 아산군 송악면 평촌리 그의 고향 마을에 있다. 1980년에 당시 아산군수 조종완(조종완)이 찬하
여 세운 묘비가 있다.
허칙(許?)과 함께 유교 숭상을 역설한『대동정로(大東正路)』
를 찬집하고 1903년에 간행하여 전해지고 있
다. 의병장 시절 사용하던 장검과 고종황제가 하사한 의대조가 서대문형무소와 독립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공로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4] 권주상
權周相
< 1881. 9. 8 ~ 1957. 4. 27 >
아산 출신의 독립 운동 유공자이다. 1919년 당시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 적서리(大湖芝面 赤鼠里)에
살고 있었으므로 대호지면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해 4월 4일 대호지면 독립만세운동 거사를 위
하여 그 곳 면장인 이인정(李寅正)을 도와 동분서주했다. 이인정은 각 마을의 구장에게 도로 보수를 명분
으로 주민들을 동원하도록 통지하고 송재만(宋在萬)의 제의에 의해 면내 유지 남계원(南桂元)을 중심으로
모든 계획을 진행하여 이날 장에 나가 격문 수백 매를 뿌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니 1,000여 명의 군
중이 이에 호응하여 장터를 누비며 천의(天宜) 장터까지 시위행진을 벌였다. 그리고 그는 이인정의 주도
에 따라 다수의 동지와 함께 천의 경찰 주재소에 이르러 주재소를 파괴할 목적으로 투석 등 폭력으로 시
위하다가 4월 4일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10월 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소요·출판법 위반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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