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33페이지

116페이지 본문시작

옛 일본어 아산군지
. 대
지로부터 분발하여 일청전쟁 최초의 고전장인 아산으로 이장함
3년(1914년) 미망인 유씨(兪氏) 병사하여 이를 합장함.
2) 고균(古筠) 金玉均 사력(事歷)
(가) 김옥균(金玉均) 처음으로 일본(日本)에 오다.
1882년의 경성사건은 원래 조선자체의 폭거로서 조선은 스스로 그 잘못
, 일본이 필히 대병을 일으켜 그 죄를 추궁할 것을 예기했다. 그리
을 깨닫고
(淸國)은 마건충(馬建忠), 정여창(丁汝昌), 오장경(吳長慶)을 파견
하여 청국
, 대원군을 유인 북경으로 호송하고 조선으로
군함을 이끌고 조선에 임하여
. 고로 우리 전권대사 정상형(井上馨 : 이
하여금 우리 예봉을 피하게 하였다
) (外務卿) 전권공사 화방의질(花房義質)의 경성에 들어와 단판
노우에가오루
을 진행하자 조선정부는 손해 배상과 기타의 요구를 받아들여 조약체결 후
박영효를 사죄사로서 김만식을 부사로 우리나라에 파견하여 새삼 사의를
. 당시 사절 일행에 따라 많은 포부를 갖고 많은 기책을 숨기고 래
표하였다
(金玉均)으로서 실로 김옥균(金玉均)이 일본에 처음 온 것
조한 것이 김옥균
이다
당시 조선은 소위 사대당이 날뛰는데 맡겨져 요로의 대관귀족은 한결같
이 청정의 제재를 받아 그 주재 관리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한 상태였다
김옥균 등 독립당의 지사 제국의 망상을 목격할 수 없어 국정의 근본적
개혁을 단행하여 그 숙원을 타파하여 독립의 결실을 올릴 것을 기하고자 하
였다
, 우선 조선에 있어서 청국의 세력을 구축하고 정권을 본국의 손으로
. 그러나 그들은 그 힘이 부족함으
회복하여 서서히 후사를 기하고자 하였다
, 우리 일본에게 의지할 필요를 느껴, 사절 일행과 같이 래조하여 후일 일
, 자기입각의 기반을 개척하고자 한 것이다. 김
본에 대하여 원조를 청하게끔
. 우선 일조 양국의 친선을
옥균이 오자 즉시 암중의 대비약을 시도하였다
(戶山學校)에
기할 몇 가지의 안건을 제시하고 유학생을 파견하여 호산학교
(井上)외무경의 주선에
입학하게끔 하고 아울러 국정개혁의 원자로서 정상
- 114 -

116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