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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만의자연환경과삶 ?113
부석면가사리포구
현재의 가시리 1, 3구는 분구되기 이전까지는 같은 마을이었다. 1구는 사장,
3구는 사냥골이라 부른다. 이 마을은 120호가 거주하는데, 그중 10여 호가 작은
33)
배 10척 정도를 소유했다. 이 배들은 3구의‘수등께’에 정박했다.
여러 갈래
의 물줄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로 인해 이곳은 수심이 깊었으나 골이 좁아 중
선은 여러 척이 정박하지 못하고 한 척씩 번갈아 들어왔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인이 민대식 씨를 감독관으로 삼아 둑을 막아 간척지를 만들었다. 가사리로부
터 태안가는 바닷길에 막아 만든 이 둑을 그 길이가 십리라 하여‘십리원둑’이
34)
라불렀다.그위에는인평저수지를만들어농수를공급할수있도록했다.
3구 앞으로는 가을철에 중선이 드나들었다. 이곳으로 들어온 중선은 황도와
광천의 배들로 주로 새우젓을 가지고 들어와 서태안으로 나갔다. 당진군을 비
롯해 서산군 운산면, 태안군까지 모두 등짐을 지어 옮겼다. 당시에는 배처럼 큰
고래도밀려들어왔으며,고래고기도많이사먹었다.
부석면강수리돌뿌리포구
강수리 2구에 중선이 1척 있었으므로 이 배에서 어획한 고기가 마을로 수시
로 들어왔다. 이외에 외지에서 젓갈을 실은 배들이 들어왔는데, 외짓배는 가을
철인 음력 9~10월에 많이 들어왔다. 제보자(76세)가 30세에는 강수리 2구의 박영
록 씨가 부리던 중선이 조기와 새우젓을 싣고 오면 주민들이 나가서 조기와 새
우젓독을 선주집까지 지어다 주고 고기를 얻어먹었다. 고기가 많을 때는 4~5명
이짐꾼으로일을했다.
33) 인근에서는 태안의 송암지역에 배가 가장 많았다. 송암에는 중선과 작은 배가 모두 있었다. 한편 태안의
진장리와 어성리의 사이를 운하로 뚫고자 했다.
34) 둑을 막기 이전에는 이곳으로 난 새댁감에서 태안군으로 왕래를 했다. 가사리에서는 서산 보다는 태안
이 가까워 태안장을 많이 보았다. 태안까지는 5~6㎞이고, 서산까지는 12㎞로 태안이 보다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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