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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서원 건립 후 100여 년이 지난 1813년(순조 13)에 건물을 중수하였다.
이듬해 작성된 중수기에 의하면 덕잠서원은 창건연대가 오래되어 점점 퇴락해
무성한 풀로 뒤덮힐 정도였는데 다행히 당시 서원의 원장이었던 영안부원군 김
조순(永安府院君 金祖淳)이 1803년(순조 3)에 먼저 정당(政堂)부터 고치고, 이
어 강당과 신문 등의 중수를 꾀하다가 1813년에야 완료하였다고 한다(영안부
원군 김조순이 중수비용을 전담했다). 이 중수기는 1825년에 김돈서(金敦敍)가
썼는데, 그는 묘비를 찬했던 김세렴의 현손이다. 중수에는 예산현감인 이명하
(李溟夏)와 장의 조문원(掌議 趙文源)·김익서(金益敍), 별유사 김종복(別有司
金宗復)이참여하였다.
이 시기의 덕잠서원의 건립 운영과 관련시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1816년
에 김구의 손자인 김갑의 효자 정려가 신암면 종경리의 김구묘소 전방에 세워
진 사실이다. 김갑은 1550년경 태어난 인물로 임진왜란 당시 어머니 진주이씨
를 모시고 피난을 가던 중 왜적에게 살해당하였다. 1500년대의 인물이 1800년
대에 정려 포장을 받고 정려를 건립하게 되는 것은 자암 김구, 혹은 덕잠서원을
통한광산김씨문중의영향력확보와연장선상에서이해될사안이기때문이다.
그후덕잠서원은1830년(순조30)남양홍씨홍병식(洪秉?)의주력으로재
실의 중수가 이루어지며, 재실 및 담장과 중문, 외문마저도 이곳저곳에서 재력
을 모아 중수하기에 이르렀다. 재실방벽을 서화로 새로 바르고 담은 기와와 돌
로써 보완하였으며, 중문과 외문을 차례로 세웠다고 한다. 이때의 중수기를 쓴
것도 후학 광산김씨 김돈서이고 예산현감인 이재정과 장의 허간, 홍병식, 별유
사김익서가참여하고있다.
그 후 1856년(철종 7)에는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이 원장이 되어 다시 중수
와 보수를 담당하고 경비를 부담하였다. 이때의 중수기를 보면 서원이 낡아 서
원 유생들과 수령이 중수경비의 마련을 걱정하는 것을 본 김좌근이 3천금을 출
연하여 새 기와를 올리고 담과 뜰을 단장하였다고 한다. 중수기를 쓴 사람은 토
정(土亭)의 후손인 한산인 이장찬이고, 예산현감 홍훈모, 장의 성맹환, 김현오,
본손김달수가주력하였다.
이 시기 중수와 관련되어 주목되는 사실은 김조순과 김좌근은 안동김씨로
예산현과 특별한 연고가 없이 한양에서 거주한 고관으로써 국정에 바쁜 분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예산의 서원 원장직을 맡았고, 그 중수 비용을 전담한 것
을 보면 김구가 어느 만큼의 명현으로 숭앙받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114│묵향의본향에서조선4대명필자암김구를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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