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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山의
김한신(金漢藎)(1720~1758)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유보(幼輔), 본관은 경주, 아
버지는영의정흥경이며어머니는황하영의딸이다.
김한신은 1732년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和順翁主)에
게 장가들어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고 벼슬은 오위도
총부도총관, 제용감제조(濟用監提調)를 지냈다. 이때는
우리나라 역대 정치사상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영조의 확고한 탕평책으로 표면적으로나마 조정이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묘 (신암면 용궁리)
안정되었고영조또한50여년에이르는전무후무한재위기간흔들림없이왕권을쥐고있었
으므로문화면에도상당히발전할수있는여지가있었다.
월성위는 부마로서 흔들림 없이 안정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39세의 나이가 되도록
아이가없었으므로그의관심은자연예술방면,즉서예였다.그리하여팔분체(八分體)에뛰
어나, 애책문(哀冊文), 시책문(諡冊文) 등을 많이 썼고 전각(篆刻)에도 뛰어나 인보(印寶)
를전각하였다.
그러나39세에자식도없이죽으니화순옹주역시14일동안굶어서남편의뒤를따라순사
하였다.아마도후사가없음에전적으로남편만바라보며살던생활에의지할기둥이없어져
그랬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영조는 식음을 폐하리 만큼 애통해 하였고 왕명으로 이들의
묘막(墓幕)을55간의규모로짓고(이는영조의지나치리만큼편협된자식편애와왕족중심
사회의모순이라하겠다)월성위의장형한식(漢植)의3자이주(?柱)로뒤를잇게하여국
왕의외손으로청요(淸要)의직을거치게하니이의자손들이차례로등과하여장자노명은
예조참판,차자노성은수원판관,4자노경은이조판서에이르게된다.4자노경의아들이김
정희로바로서예에있어서일가경의극치를이룬추사체를이루었다.
월성위의묘는신암면용궁리에화순옹주와함께있다.시호는정효(貞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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