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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순헌기의 내용에는 남구만의 고향에 대한 향수가 짙게 배어있다.
할아버지 남식(南?)은 1639년 평강현감에서 물러난 후에 결성의 구산에서 노부
모를 봉양하며 살았다. 이후 남식은 결혼한 큰아들 남일성(南一星)을 위해 용와리
에 있는 하씨 집을 구입하여 분가시켰던 듯하다. 비록 집이 화려하진 않았지만 주
변 풍광을 감상하며 지낼 만 했다. 할아버지는 숙부인 남이성(南二星)에게 용촌별
서기를 짓도록 했는데, 산천과 못과 포구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내용이었다고 회
상하고 있다.
또한 어느 초여름에 할아버지가 구산에서 용와리를 방문했던 듯하다. 어머니가
죽순을 조리하여 점심 반찬으로 내왔는데 할아버지가 극구 칭찬하며 맛있게 먹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 남구만은 11살 어린 나이였다. 나이 70여세가 되었어도 60여 년 전의
어릴 적 용와리에서 있었던 일들과 떠나 온 고향을 잊지 못하고 있다. 옛집으로
돌아가는 아들의 부탁을 받아 ‘절순헌(折筍軒)’이라는 고향집의 당호를 지어주며 쓴
글이다.
이외에 남구만이 잠시 벼슬에서 물러나 결성에 은거할 때의 일화도 약천집 연보에
전한다. 42세 때인 1670년 4월에 어머니를 모시고 결성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다.
이 당시에 결성으로 돌아오면서 주변에 가깝게 지내는 인사들에게도 알리지 않
았던 듯하다. 남구만이 공(公)과 사(私)를 철저하게 구별하여 행동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당시에 홍주목사를 지낸 이세화와 남구만의 일화가 연보에 기록되었다.
이번에 길을 떠날 때에 홍주성(洪州城)에서 10리 를 지나 전려로 돌아갔는데, 홍주목사
이공 세화(李公世華)와는 예부터 친하였으나 공은 통문하지 않았다. 이공이 공의 서울 집
에 음식을 전하게 하였는데, 음식을 가지고 간 사람이 돌아와 말하기를,
“남영감이 결성으로 돌아간 지 이미 여러 달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이공이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옛날에 비록 관청에는 드나들지 말라는 말이 있으나 어찌 나를 박대함이 이와 같은가?”
하고 자주 와서 만나보았으나, 공은 한 번도 답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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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 향토문화 회원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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