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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피신하고 세자를 호종하여 전주로 피난하였다. 그 공으로 호피와 말을 특별히 하사받
요한 계기가 된다. 조극선은 박지계와 조익을 스승으로 섬겼다. 그는 1618년(광해군 10) 24
았다. 이어 강릉부사, 형조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1630년(인조 8) 시국의 폐단을 논하는 상
살 때 덕산 인근 신창에 우거하던 박지계를 찾아 그의 인정을 받았다. 박지계는 좀처럼 남
소를 올려 대사간이 되었다가 병조참판을 거쳐 병으로 사직하였다. 강릉부사 시절에는 시폐
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는데 조극선을 보고는 큰 그릇으로 인정하고 친절하게 학문의 절차를
를 혁파하여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양천의 운당골로 들어가 두어 칸 집을 짓고 살았
일러주었다. 이해 겨울 조극선은 신창으로 가서 조익을 뵙고는 가르침을 입었다. 이때 조익
는데,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였다. 호를 ‘잠와(潛窩)’라고 하였는데, 이때부터 그 집을 ‘퇴사
은 “학자는 마땅히 공맹(孔孟)을 모범으로 삼아야 하며, 공맹의 유법(遺法)은 오로지 사서
재(退思齋)’라고 하였다. 1630년(인조 8) 12월 22일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국록을
에 있다.” 하고, 사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박지계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었다. 이
먹은 지 30년이 되었으나 제대로 입을 만한 옷 한 벌이 없고 처자는 항상 주린 빛이었다. 임
로써 조극선은 이명준, 박지계, 조익을 아울러 사사함으로써 학문의 연원이 있게 되었고, 사
금이 “이명준은 나라 일에 온 정성을 바치었고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 뜻을 두었는데 불
우 관계의 범위도 넓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학통 인식의 무게 중심은 점차 조익에 있었다.
행히 세상을 떠나니 내가 심히 애석하게 생각한다. 그 초상 비용이나 장사의 용역을 모두 국
그는 조익을 순정(醇正)한 학문, 고매한 지식, 독실한 행실, 걸출한 재국(才局)을 갖춘 군자
가에서 지급하여 충성을 밝혀주라.”고 하였다. 1631년 2월 16일 예장하였으며, 묘소는 덕
로 존경하고, 요·순-정자·주자-우계·율곡으로 이어지는 도맥(道脈)의 계승자로 평가하였
산면 신평리에 있다. 1644년(인조 22)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저서에는 『잠와유고(潛窩遺
다. 아산 신창에 소재한 도산서원은 1660년(현종 1) 조익의 주향처(主享處)로 건립된 서원
稿)』 등 4권이 있으며 인조 때 청백리로 녹훈되었다.
이며, 신창은 조익이 우거, 강학한 곳으로 일찍이 조극선이 왕래하며 수업하던 곳이다. 조극
조극선(趙克善: 1595~1658)의 자는 유저(有諸), 호는 야곡(冶谷), 야산(冶山), 야천(冶
선이 죽은 후 1721년(경종 1) 봄 신창 선비들을 비롯한 호서 사림들은 조극선의 도산서원 종
川), 본관은 한양이다. 1595년(선조 28) 예산군 봉산면 효교리에서 태어났는데, 부친 조경진
향을 추진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조극선이 가장 긴밀하게 교유한 인물은 박유근(朴由近),
은 박지계(朴知誡), 조익(趙翼)의 문인이다. 덕산으로 이사 온 이후 한양조씨 가문의 중흥의
박유연(朴由淵), 조진양(趙進陽), 조복양(趙復陽), 윤상거(尹商擧), 윤선거(尹宣擧), 권시
기틀을 마련한 이는 조극선의 조부 조흥무(趙興武)였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지는 못했으나
(權?), 민광소(閔光?), 민기수(閔祺壽), 이평(李秤), 박승휴(朴承休), 심지호(沈之灝) 등
점차 학행이 널리 알려져 중년 이후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집에는 배움을
이다. 이들 대부분은 학통상 우계학파에 속하고 정치적으로는 소론을 표방하였다. 박유근 ·
청하는 이들로 가득 찼고, 심지어 다른 고을에서 양식을 지고 오는 학생들도 있었다. 이렇게
박유연 형제는 박지계의 아들이고, 조진양 · 조복양 형제는 조익의 아들이고, 윤상거 · 윤선
모여든 문인, 제자들이 서로 힘을 합쳐 서당을 건립하여 학업과 유식의 장소로 활용하게 됨
거 형제는 윤황의 아들이고, 민광소는 박지계의 사위였으며, 권시와 민기수는 박지계, 조익
으로써, 덕산 대야곡 일대는 호서사림이 주목하는 학술 공간이 되었다. 조극선은 바로 그의
의 문인이었다. 묘갈명을 지은 윤증은 윤선거의 아들이고, 행장을 지은 남구만은 박세채의
아들이자 제자였다. 후일 조극선이 산림으로 부름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 조경진의
문인이고, 묘지명을 지은 박세채는 소론계의 영수였다. 후일 『삼관기(三官記)』의 서문을 쓴
엄격한 가르침 덕분이었다. 15세 되던 1609년(광해군 1) 당시 덕산현감으로 부임한 이명준
윤동수(尹東洙)는 윤선거의 증손이었다. 그의 조부 윤추(尹推)는 조익의 손자사위이자 조
(李命俊)은 관내 선비들을 모아 강학하였는데 이때 조극선은 그의 문인이 되었다. 이명준은
극선의 문인이다. 윤동수가 서문에서 조익과 조극선의 사제 관계, 조극선과 윤선거 · 윤추
조욱(趙昱)과 조식(曹植)의 문인인 이제신(李濟臣)의 아들로, 그 자신은 우계 성혼(牛溪 成
의 사우 관계, 자신과 풍양 조씨 포저 가문의 인척 관계를 강조한 것에서도 파평 윤씨 팔송
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또한 이명준의 매부가 신흠(申欽)이고, 신흠의 외손자가 소론
가문, 풍양조씨 포저가문, 한양 조씨 야곡가문 상호간의 학연, 혈연에 바탕한 세의를 확인할
의 영수인 박세채(朴世采)이므로 이명준의 학문적 계보는 우계학파 내지 소론파에 닿아있
수 있다.
다고 볼 수 있다.
조극선은 1623년(인조 1) 스승 조익의 추천으로 동몽교관에 임명되었고, 1626년(인조
그런데 이명준과 조극선의 사승 관계는 덕산의 조씨들이 소론 우계학파를 표방하는 중
4) 종부시 주부가 되어 종실의 기강을 바로잡았으며, 공조좌랑이 되어서는 폐단 20여 조항
3.선비의고장,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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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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