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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지역에 광산김씨들이 입향하는 것은 1500년대 초반이다. 광산김씨
의 입향시조는 1500년대 초반 대흥군수로 예산 신암에 정착한 김계문(金季文,
1462~1526년)이며, 김구는 바로 김계문의 아들이다. 김계문은 대흥군수를 역
임하던 중 대흥관아에서 사망했다고 하는데, 그가 예산현 신암에 입향하게 된
것은 처가인 전의이씨 문중이 세거하고 있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전의이씨는
조선초기부터 대술면 부근을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었다고 전하며, 특히 광산김
씨의묘소가있는종경리일대는원래전의이씨문중터였다고한다.
자암 김구는 예산 신암 태생으로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전고대
방 김굉필 문인록 참조) 조광조·김정 등과 돈독한 우의를 맺고 개혁정치를 추
진하다가 1529년(중종 14)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여러 지역에 유배되었던 인물
이다. 그는 정광필과 안당에게 구조되어 처음에는 개령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남해의 섬으로 옮겨졌다.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 예산 신암에 돌아와 부모의 묘
소를 처음 참배할 때 산소 앞 모토교 위에서 부모의 묘소를 바라보다가 기절하
여 말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그는 이때 다친 병을 회복하지 못하고 47세에 세
상을떠났다.그의인물과성품에대하여는김세렴(金世濂)이찬한묘비명에서
‘중종이 문치에 뜻을 두어 매진하매 정암 조선생, 충암 김선생과 더
불어 임금을 도와 좋은 정치를 회복하려 하였는데 남곤 심정이 대역으
로 몰아 모두 귀양을 갔다. 정암과 충암은 죽음을 면치 못했고 자암은
15년 귀양살이를 하다가 돌아왔는데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났으므로 부
모 산소에 올라가 피눈물을 뿌리며 통곡하다가 1534년 갑오년에 47세의
나이로 병으로 돌아가셨다.’
고 찬하고 있다. 그가 예산의 덕잠서원에 제향되는 것도 실은 이 같은 그의 행
적과그의“가향(家鄕)”이라는이유때문이었다.
덕잠서원의 건립 과정은 김구에 대한 일련의 추숭활동이 예산지역에서 일
어나는 것과 관련된다. 즉 그에 대한 추숭활동은 증직과 묘비 및 신도비 건립이
먼저 이루어지는데, 1591년(선조 24)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그의 문집인『자
암집(自菴集)』이 1636년(인조 14)에 초간되며, 4년 뒤인 1640년(인조 18)에
는 자암 김구의 묘비가 건립(김세렴 찬·전, 외현손 안응감安應鑑 서)된다. 또
1659년(효종 10)에는 문집의 중간본이 외현손인 안응창(安應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문집 서문은 1659년 鄭斗卿 찬). 이러한 여러 활동이 1600년대 중
반에 서서히 나타나는 것과 더불어「자암선생서첩발문(自菴先生書帖跋文)」을
112│묵향의본향에서조선4대명필자암김구를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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