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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일본어 아산군지
5) 귀환
. 그래서 야간행군을 택
당시 더위 맹렬하여 대낮의 행군은 크게 어려웠다
8월 1일에는 오후 4시 평택을 출발 진위(振威)에 도착 야영하였
하여 다음
. 이 날 여단장은 소사장(素沙場)에 있는 야전병원 및 위생대에 명하여 귀
환에 오르도록 하였고 전신대로 하여금 통신소를 개설케 하였다
8월 2일은 오후 5시 반 진위(振威) 출발 다음 3일 오전 6시 수원(水原)에
. 연도의 조선민(朝鮮民) 전일의 배일배척은 없었던 듯
도착 여기서 야영함
. 연일의 야간행군은 큰 피로를 느끼게 하여
밥과 장을 갖고 아군을 마중함
8월 4일 오전 3시 수원출발, 10시 반 과천(果川)도착, 8월 5일 오전 1시 과천
)발동, 4시반 동작진(銅雀津) 착동, 8시반 한강(漢江)의 도강을 마치고
果川
(龍山)으로 향함. 도중관민 개선문을 설치. 국왕의 칙사 및 대도공사(大
용산
) 이하 일본관민(日本官民)이 나와 마중, 개선식을 거행 성대한 연회
島公使
(天皇陛下), 조선(朝鮮)국왕 및 아군의
를 베풀어 군대를 위로하고 천황폐하
(龍山)
만세를 축하고 그 소리 천지를 진동하다 식이 끝나고 각 부대는 용산
의 병영으로 들어감
6) 말미
7월 25일 남정의 길을 떠나 여기에 12여일 그
혼성여단 청병 소탕 때문에
. 거기에 삼복의 맹염이 돌
간 지리에 어둡고 병참이 뒤따르지 못하기 일수
. 전투부대 뿐만 아니라 제대 모두
을 불태우고 하여 행군이 몹시 어려웠다
곤란을 겪다
3047, 포8문에 대해 백중한 병력으로 청군
더구나 그 병력의 비교는 아군
에 대치했지만 공수의 위치가 다르다보니 그 곤란은 이루 말로는 다할 수
없다
(天安)에 있는 엽지초(葉志超)의 병력 1,000 및 고승호(高陞
생각건대 천안
)의 1200 간격을 두고 포 12문을 합할 때 그는 우로 우리를 능가 승패의
운수 여기에서 역전되었다
500을 밑돌지 않고 아군의 사상은 82명으로서
이 전투에서 청군의 사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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