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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 기묘년(1639, 인조17)에 선조고(先祖考) 평강 부군(平康府君, 평강 현감을 지낸 할
아버지 남식을 말함)이 고을의 현감을 해임하고 돌아와 결성(結城)의 구산(龜山)에서 한가
롭게 지냈는데, 선고인 금성 부군(金城府君, 금성 현령을 지낸 아버지 남일성을 말함)을
위하여 용와리(龍臥里)에 있는 하씨(河氏)의 집을 사니, 규모는 비록 질박하였으나 또한
몸을 용납할 만하였다. 다시 두 칸의 대청을 동쪽 모퉁이에 지어서 겨울이면 남쪽 창문을
열어 햇볕을 맞이하고 여름이면 북쪽 문을 열어 멀리 바라보곤 하였다. 조고는 숙부인 판
서공에게 명하여 용촌별서기(龍村別墅記)를 짓게 하였는데, 산천과 못과 포구의 아름다운
경치를 대단히 칭찬하였다.
선고가 뜰 앞에 대나무를 심었으나 미처 숲을 이루지 못하여 초여름에 나온 대순이 겨우
10여 개였다. 하루는 조고가 구산으로부터 이곳에 왕림하니, 선비(先?;남에게 세상 떠난
자기 어머니를 이르는 말)가 손수 그 대순을 꺾어 점심 반찬을 장만해 올렸다. 조고는 흔
쾌히 들고 훌륭한 맛을 극구 칭찬하면서 “이것은 일찍이 구산에서 맛보지 못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때 나는 나이가 겨우 11세여서 비록 지각과 식견이 없었으나 선비가 반찬을 조리할 때
에 공경하고 삼가던 모습과 조고가 식사를 들며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던 기색이 아직도
마음과 눈에 삼삼하게 남아있다.
이제 육십갑자가 한 번 돌아서 유풍(流風)이 날로 멀어지고, 이 몸도 벼슬살이하느라 고
향을 떠난 지가 오래되었다. 그리하여 이미 고향과 멀리 떨어져 있어 공경하는 마음을 펴
지 못한 데다, 어리던 이 자식이 이미 장성하고 또 노쇠하여 죽으려 하니, 길이 사모하는
애통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 나이가 칠십이 되어서 일을 하직할 때가 되
었으니, 더욱이 고향에 돌아가서 선인의 옛집을 지켜야 할 것이다. (중략)
이제 나는 조정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오래도록 허락받지 못하였으므로 경기(京畿)
의 근교에 우거하여 이직도 수구(首丘)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는 구릉과 초목을 비록 한 번 바라보고 회포를 풀고자 하나 될 수가 없다.(중략)
이제 아들 학명(鶴鳴)이 일 때문에 옛날 살던 곳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내가 고향 마을을
그리워하여 마지않음을 안타깝게 여기고는 헌(軒)의 이름을 지어 줄 것을 청하고, 또 헌
의 이름을 붙인 뜻을 기록할 것을 청해서 이것을 판각하여 걸어서 나의 뜻을 위로해 주
고자 하였다. 이에 내가 기록하는 것이다.
헌(軒)이 이루어진 지 60년이 지난 이듬해 경진년(1700, 숙종26) 모춘에 볼초손남(不肖
孫男)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구만은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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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향토문화(洪州鄕土文化) 제3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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