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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허씨
許氏
< ? ~ ? > -이동우의 처
조선시대의 열녀로 이동우(李東遇)의 처다. 아들 하나를 낳고 남편이 죽으니 밤낮으로 하늘에 부르짖으
며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장사지낼 날짜가 정해지자 그는 남모르게 소금물을 마시고 죽으니 같은
날에 수한성(水漢城-물앙산성) 아래에 장사지냈다.
[73] 홀개
忽介
< ? ~ ? >
조선 후기 영조 때의 열녀다. 아산현의 관비(官婢)로 온순하고 얼굴이 아름다웠다. 품관(品官) 이인눌(李
仁訥)이 죽으니 열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인눌의 유복자를 낳았다. 남편이 없으니 관아의 종 하나가 그녀를
넘보게 되었다. 그는 송곳으로 살을 찌르면서 온갖 어려움을 견뎌 내며 끝내 복종하지 않고 머리를 깎아
스스로 맹서하며 정절을 온전히 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져 1729년(영조 5)에 정려를 세웠다. 현재는 전해
지지 않으며 영인면 아산리 영인농협 길 건너편에 그의 정려각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74] 홍절
<1571(선조 4년) ~ 1645(인조 23년) >
조선 후기의 효자로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명신(名臣) 만전(晩全) 가신(可臣)의 아들이며 자는 자고(子
高)다. 효성이 지극하여 늘 예로써 부모를 섬겼고 부모의 병환 중에 7년 동안이나 옷 띠를 풀지 않고 곁에
서 시중을 들었다. 나라에서 음직으로 참봉을 제수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은일
(隱逸)로 살다가 75세로 세상을 떴다. 사후인 1669년(현종 10)에 현종이 온양온천에 행차했을 때 그의 효
행 사실을 듣고 형조좌랑을 추증했다. 묘는 신창면 행목리에 있다.
[75] 황의길
黃義吉
< ? ~ ? >
조선 후기의 효자로 신창현 사람이다. 본관은 창원(昌原)이며 우해(禹海)의 아들이다. 병자호란
(1636~1637) 때에 어머니 박(朴)씨가 적의 기병을 피해 물에 뛰어 들자 그도 뛰어들어 어머님을 껴안고
함께 익사했다. 인조 때 신창현 대동면 웅산리, 현재 득산동 득백이에 어머니의 열녀 정려와 함께 효자 정
려를 세웠다. 그 후 정려각이 없어졌다. 현재는 그 자리에 1878년(고종 15) 당시 신창현감 심명영(沈命永)
이‘고 황의길 모자 병정( 旌) 유허비’
라 제(題)해서 세운 유허비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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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氏
< ? ~ ? > -이동우의 처
조선시대의 열녀로 이동우(李東遇)의 처다. 아들 하나를 낳고 남편이 죽으니 밤낮으로 하늘에 부르짖으
며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장사지낼 날짜가 정해지자 그는 남모르게 소금물을 마시고 죽으니 같은
날에 수한성(水漢城-물앙산성) 아래에 장사지냈다.
[73] 홀개
忽介
< ? ~ ? >
조선 후기 영조 때의 열녀다. 아산현의 관비(官婢)로 온순하고 얼굴이 아름다웠다. 품관(品官) 이인눌(李
仁訥)이 죽으니 열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인눌의 유복자를 낳았다. 남편이 없으니 관아의 종 하나가 그녀를
넘보게 되었다. 그는 송곳으로 살을 찌르면서 온갖 어려움을 견뎌 내며 끝내 복종하지 않고 머리를 깎아
스스로 맹서하며 정절을 온전히 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져 1729년(영조 5)에 정려를 세웠다. 현재는 전해
지지 않으며 영인면 아산리 영인농협 길 건너편에 그의 정려각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74] 홍절
<1571(선조 4년) ~ 1645(인조 23년) >
조선 후기의 효자로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명신(名臣) 만전(晩全) 가신(可臣)의 아들이며 자는 자고(子
高)다. 효성이 지극하여 늘 예로써 부모를 섬겼고 부모의 병환 중에 7년 동안이나 옷 띠를 풀지 않고 곁에
서 시중을 들었다. 나라에서 음직으로 참봉을 제수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은일
(隱逸)로 살다가 75세로 세상을 떴다. 사후인 1669년(현종 10)에 현종이 온양온천에 행차했을 때 그의 효
행 사실을 듣고 형조좌랑을 추증했다. 묘는 신창면 행목리에 있다.
[75] 황의길
黃義吉
< ? ~ ? >
조선 후기의 효자로 신창현 사람이다. 본관은 창원(昌原)이며 우해(禹海)의 아들이다. 병자호란
(1636~1637) 때에 어머니 박(朴)씨가 적의 기병을 피해 물에 뛰어 들자 그도 뛰어들어 어머님을 껴안고
함께 익사했다. 인조 때 신창현 대동면 웅산리, 현재 득산동 득백이에 어머니의 열녀 정려와 함께 효자 정
려를 세웠다. 그 후 정려각이 없어졌다. 현재는 그 자리에 1878년(고종 15) 당시 신창현감 심명영(沈命永)
이‘고 황의길 모자 병정( 旌) 유허비’
라 제(題)해서 세운 유허비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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