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80페이지

113페이지 본문시작

[72] 허씨
許氏
< ? ~ ? > -이동우의 처
조선시대의 열녀로 이동우(李東遇)의 처다. 아들 하나를 낳고 남편이 죽으니 밤낮으로 하늘에 부르짖으
며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장사지낼 날짜가 정해지자 그는 남모르게 소금물을 마시고 죽으니 같은
날에 수한성(水漢城-물앙산성) 아래에 장사지냈다.
[73] 홀개
忽介
< ? ~ ? >
조선 후기 영조 때의 열녀다. 아산현의 관비(官婢)로 온순하고 얼굴이 아름다웠다. 품관(品官) 이인눌(李
仁訥)이 죽으니 열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인눌의 유복자를 낳았다. 남편이 없으니 관아의 종 하나가 그녀를
넘보게 되었다. 그는 송곳으로 살을 찌르면서 온갖 어려움을 견뎌 내며 끝내 복종하지 않고 머리를 깎아
스스로 맹서하며 정절을 온전히 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져 1729년(영조 5)에 정려를 세웠다. 현재는 전해
지지 않으며 영인면 아산리 영인농협 길 건너편에 그의 정려각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74] 홍절
<1571(선조 4년) ~ 1645(인조 23년) >
조선 후기의 효자로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명신(名臣) 만전(晩全) 가신(可臣)의 아들이며 자는 자고(子
高)다. 효성이 지극하여 늘 예로써 부모를 섬겼고 부모의 병환 중에 7년 동안이나 옷 띠를 풀지 않고 곁에
서 시중을 들었다. 나라에서 음직으로 참봉을 제수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은일
(隱逸)로 살다가 75세로 세상을 떴다. 사후인 1669년(현종 10)에 현종이 온양온천에 행차했을 때 그의 효
행 사실을 듣고 형조좌랑을 추증했다. 묘는 신창면 행목리에 있다.
[75] 황의길
黃義吉
< ? ~ ? >
조선 후기의 효자로 신창현 사람이다. 본관은 창원(昌原)이며 우해(禹海)의 아들이다. 병자호란
(1636~1637) 때에 어머니 박(朴)씨가 적의 기병을 피해 물에 뛰어 들자 그도 뛰어들어 어머님을 껴안고
함께 익사했다. 인조 때 신창현 대동면 웅산리, 현재 득산동 득백이에 어머니의 열녀 정려와 함께 효자 정
려를 세웠다. 그 후 정려각이 없어졌다. 현재는 그 자리에 1878년(고종 15) 당시 신창현감 심명영(沈命永)
이‘고 황의길 모자 병정( 旌) 유허비’
라 제(題)해서 세운 유허비가 남아 있다.
112

113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