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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에서 이정구(李廷龜)에게서 배웠다. 또 17살 때에는 외종조 윤근수(尹根壽)에게서 문
자주적 입장에서 학문을 하여 진리는 천하 고금을 통해 다를 바
장을 배웠다. 이정구는 우계 성혼의 문인이다. 1602년 별시문과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없는 공물(公物)이라 하고, 성현의 말씀이나 가르침, 그리고 후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611년(광해군 3)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정여창 등을
현(後賢)의 경전 해석은 바로 이러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라
문묘에 배향할 것을 주장하다가 고산찰방으로 좌천되고, 이어 웅천현감을 역임하였다. 뒤
하였다. 만약 혹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마땅히 거듭 깊이 생각하
이어 인목대비가 유폐되는 사태가 빚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경기도 광주로 은거하
여 그 귀착처를 궁구하여 극진히 할 뿐이라 하였다. 이처럼 그는
조익선생묘
였다가 충청도 신창으로 옮겨 살았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이조좌랑에 임명되어 신창
당시 주자학 일색의 학문 풍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학문하고
???출처:문화재청
을 떠나 다시 조정에 들어갔다. 이듬해 의정부 검상사인에 임명되고, 이어 응교, 직제학 등
자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젊어서 유학뿐만 아니라, 음률(音律),
을 거쳐 동부승지에 올랐다. 1631년 어머니가 죽자 잠시 벼슬을 떠났으나 3년상을 마친 뒤
복서(卜筮), 병법(兵法), 불교, 양명학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섭
곧 관직에 복귀하였다. 한성부우윤, 개성부 유수, 대사간, 이조참판, 대사성, 예조판서, 대사
렵하였다. 조익은 많은 저술을 하였고 성리학, 역학, 경학 등 다
헌,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이원익을 도와 대동법을 확대 관리하는 일
방면에 조예가 깊었는데, 초기에만 성리학에 관심을 가졌을 뿐
에 적극 참여하였다. 1636년(인조 14) 예조판서로 있을 때 병자호란을 당하자 종묘를 강화
후기에는 경(敬)을 중심으로 내면적인 수양에 주력하였다. 따
도로 옮기고, 뒤이어 인조를 호종하려다가 아들 진양(進陽)으로 하여금 강화도로 모시게 하
라서 그의 학문은 양명학의 심학과 함께 성리학의 주경적(主敬
的) 심학을 아우르고 있다.
였던 아버지가 도중에 실종되어 며칠 동안 아버지를 찾느라 직무를 이탈하여 인조를 호종
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호란이 끝난 뒤 그 죄가 거론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지
이명준(李命俊: 1572~1630)의 자는 창기(昌期), 호는 잠와
만, 그 까닭이 효성을 다하고자 한 데 있었고, 아버지를 강화도로 도피시킨 뒤에는 윤계(尹
(潛窩), 진사재(進思齋), 본관은 전의이다. 부친은 병마절도사
啓), 심지원(沈之源) 등과 함께 경기 지역의 패잔병 등을 모아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적
청강 이제신(淸江 李濟臣)의 아들로 이항복, 성혼의 문하에서
을 공격하여 입성하고자 노력한 사실이 참작되어 그해 12월에 석방되었다. 그 후 3년 뒤에
수학하였다. 1601년(선조 34) 생원시에 합격하고 1603년 정시
원손보양관으로 조정에 들라는 하명을 받았으나 늙은 아버지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
문과에 장원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으며, 예조와 병조의 좌랑
절하였다. 뒤이어 예조판서, 이조판서, 대사헌의 직이 내려졌지만, 모두 사양하다가 아버지
을 지냈다. 1604년(선조 37)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형조
가 죽고 상복을 벗게 되자 1648년(인조 26) 좌참찬이 되어 다시 조정에 나갔다. 이후 1655
좌랑, 병조좌랑, 고산도찰방, 덕산현감과 평양서윤 등을 역임하
년(효종 6) 3월 중추부영사로 죽기까지 우의정, 좌의정과 중추부판사, 영사의 자리를 거듭
였다.
역임하였다. 고향 광주에서 77세로 죽으니 효종은 ‘문효(文孝)’의 시호를 내렸다. 예산 대흥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 때 영덕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현 동화산에 안장하였는데, 그 후 신양면 신양리 백석에 이장하였다. 뒷날 광주의 명고서원,
그는 이항복이 폐모(廢母)를 반대하다 죄를 얻었다는 말을 듣
개성의 숭양서원, 신창의 도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문집 『포저집(浦渚集)』이 있
고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극렬해 현리가 감히 받지 못하였
고, 『역상개략(易象槪略)』은 그 이름만 전한다.
다 한다.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해 장령에 복직되어 영남암행
조익은 최명길(崔鳴吉), 장유(張維), 이시백(李時白)과 일찍부터 친밀한 교우 관계를 맺
어사, 충청관찰사, 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이괄의 난 때 임
어 세칭 ‘사우(四友)’로 불리었다. 그는 학통이 외종조 윤근수를 통해 겉으로는 퇴계학파에
금이 공주로 피난하였는데 옆에서 항상 결핍이 없게 한 공으로
닿아있지만 실제로는 우계학파로서 조선 초기 양명학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는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왕은 강화
3.선비의고장,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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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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