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80페이지

112페이지 본문시작

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시아버지가 병으로 눕게 되자 그 이후 남편과 함께 좋은 약을 구해다 드리며 오랜
동안 정성스레 간병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세가 위중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살을 베어 약과 함께 다려서 드리니 병환이 낫게 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이 사실을 듣고 칭송하며 세상에
널리 알리니 마침내 조정에서 이를 알고 1893년(고종 30)에 효부로 정려를 명했다. 지금도 인주면 금성리
강당말에 그 효부 정려가 전해진다.
[69] 최익대
崔翼大
< ? ~ ? >
조선 후기의 효자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평도공(平度公) 죽정(竹亭) 유경(有慶)의 후손이며 참봉 덕
영(悳榮)의 아들이다. 자는 한경(漢慶)이고 호는 송암(松庵)이며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덕행이 있었
다. 어머니의 병환에 제단을 만들고 하늘에 기도하기를 내 몸으로 대신하여 병을 앓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병환이 위급해지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 넣어 회생시켰다. 또한 어머니가 오리 고기가 먹
고 싶다고 하자 갑자기 새매가 오리를 잡아다가 땅에 떨어뜨리므로 어머니에게 드려서 효험을 얻었다. 고
을과 도(道)의 사람들이 천거하여 관부로부터 상금과 상장을 받았다. 그가 살고 있는 마낭동(馬郞洞-만향
골, 현재의 도고면 효자리)을 효자리(孝子里)라 고쳐 부르게 하였다.
[70] 하유성
河有成
< ? ~ ? >
조선시대의 효자로 신창현(선장면 대흥리)의 광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병을 앓을 때 몇 달 동
안 옷을 벗지 않고 곁에서 간호했다. 아버지가 기절하자 가운데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여드려 효력이 있
었고 다시 다섯째 손가락의 피를 내어 입에 넣어드렸더니 닷새를 더 살고 죽었다. 장사를 지낸 뒤에 하루
에 세 번씩 가서 성묘하기를 비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안 가는 날이 없었고 눈물로 근처의 풀이 죽을 정도
였다. 이런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가 세워졌고 공조참판(工曹參判-종2품)에 추증되었다. 정려
는 선장면 대흥리 어촌 마을에 세워졌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정문터’
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71] 허교
許喬
< ? ~ ? >
조선 시대의 효자로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집이 가난하여 나물과 좁쌀도
먹기 어려웠으나 봉양에 힘을 다하여 언제나 좋은 음식을 마련하여 부모에게 드렸다. 모친의 병환에 손가
락을 끊어 피를 흘려 넣어 곧 치유시켰다. 고을에서 그의 효행을 칭송했다.
111

112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