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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운데자암김구는생원과진사시에모두장원을하여명성이높았던인
물로서 이정형(1549~1607년)은《황토기사》에서“김구의 초서가 천하제일이
라 칭하였는데, 김구의 글씨가 명나라에 알려져서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는 말이 들리자 글씨쓰기를 기꺼워하지 않아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드물다.”고
하였다. 김구의 신도비명을 지은 김세렴은“선정신, 모제 김안국(1478~1543
년)이 과거시험장의 고관(考官)이었는데 그 시권을 가르키며‘한퇴지의 작문
에 왕희지의 글씨로다!’라고 평하였다. 마침내 생원 진사 모두 장원이 되니 국
조에 드문 일이다. 필법이 강건하고 스스로 일가를 이루어 세상에서는 인수체
(仁壽體)라 하는데, 대개 공이 인수방에 살았기 때문이다. 뒤에 화인(華人)들
이구입한다는말을듣자절필하고쓰지않아서세상에전해지는것이드물다.”
고 김구의 서체가 왕희지체 였다는 사실을 전하였다.《기묘록보유》를 지은 안
로(1580~1657년)는 김구의 글씨에 대해“공의 필력이 경건(勁健)하여 종요(鍾
繇).왕희지(王羲之)의 필법을 본받았다. 일찍이 명나라사람이 공의 글씨를 보배
로 여긴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드디어 쓰지 않으므로 그의 필적이 세상에 드물
다.”고 평하였다. [기묘록보유]상권 김구전《해동잡록》에서도 김구는 문명이 있
었고 필법의 굳셈이 종요와 왕희지를 본받았는데, 공이 일찍이 명나라 사람들
이 자기의 글씨를 사들인다는 소문을 듣고는 글씨를 쓰지 아니하였으므로 세상
에전하는것이드물다.”고하여김육과같은내용을기록하고있다.
이를 종합해보면 김구는 왕희지체를 연구하였던 것이고, 특히 초서에 능해
명나라에까지 명성이 자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구의 글씨를 소장하기 위해
구입하려는 명나라 사람들의 움직임이 전해지자 작품 활동을 중단한 것은 김구
의 도학자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김구에 대해서는
글씨와 관련된 이야기보다는 기묘명현으로서 학문연마에 열중하던 모습이 대
표적인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정조는「일득록」에서“김구가 집현전을 지키며
달밤에 독서하니 중종께서 가상히 여겨 선온(宣?)하여 장려하신 일이 있어 오
늘에 이르도록 아름다운 일로 전해진다.”며 그 자세를 높이 평가하였다. [홍제
전서]권2「일득록」이러한 김구가 4대가에 포함되었던 것은 김안국의 평도 있
었지만, 명나라 사람들이 그 글씨를 높이 평가하여 구입하고자 하였다는 사실
이더욱중요한기준이된것같다.
이상은 승정원일기, 대동서법, 기묘록보유, 기묘명현록, 홍제전서 등에 기
록된 내용‘조선전기 4대 명필론’의 성립과정(정해득, 한신대외래교수) 중
자암 김구에 대한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4장조선4대명필자암김구│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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