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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은 전쟁 영웅이었나?
드라마 속 계백은 무왕 때부터 전쟁 영웅이었다.
의자왕 즉위 이후에는약 40개의 신라 성( )을 연속으로 빼앗았
다. 하지만 실제로는 황산벌 전투가 계백의 처녀 출전이었다.
그 이전에는 전쟁을 지휘한 적이 없었다. <삼국사기> ‘백제본
기’의자왕 편에 따르면 신라 성 40개를 한 달 만에 빼앗은 주
황산벌 전투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계백
역은 의자왕이었다. 왕이 직접 출전하여 그런 대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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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은 왜 독재자가 되었나?
의자왕은 말년에 독재자가 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20년간의 재위기간 중에서 15년 동안
의자왕은 대단히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신라와의 전쟁에서 거의 대부분 승리했고, 고구려?말갈?
왜국과의 외교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계속되는 성공이 의자왕의 권력을 공고히 했고 이것이 독재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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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은 계백을 시기했을까?
드라마 속의 의자왕은 계백을 무척이나 시기했다. 왕후인 은고(송지효 분)가 계백을 연모하는데다
가 계백이 국민적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실제의 의자왕은 계백을 시기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의자
왕은 열심히 일하고 많은 성과를 거둔 군주였다. 계백이 시기했다면 모를까, 의자왕이 그렇게 할 이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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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은 나당연합군을 두려워했을까?
나당연합군이 양쪽에서 협공해 오자, 드라마 속의 의자왕은 불안에 떨었다.
『삼국사기』
에 묘사된
의자왕의 표정은 정반대였다. 나당연합군이 침공해 오자, 백제 조정에서는 2가지 카드가 논의되었다.
하나는, 서부전선 최전방인 기벌포(금강 입구)에서 당나라군을 막고 동부전선 최전방인 탄현에서 신라군을
막는 한편, 나당연합군의 군량미가 떨어질 때까지 장기전을 펴다가 결정적 순간에 적들을 물리치자는 것
이었다. 또 하나는, 기벌포와 탄현을 그냥 내주고 적군을 안쪽 깊숙이 끌어들인 뒤 속전속결로 일망타진
하자는 것이었다. 의자왕은 후자를 선택했다. 백제군이 그만한 전력을 갖고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결국 그 작전 때문에 멸망했지만 개전 직전만 해도 의자왕은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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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은 왜 5천 군대만 갖고 출정했나?
드라마에서는 백제 군사가 부족해서 5천 명밖에 거느릴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백제 조정에서는 5천 명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신라군은 나당연합군 전체의 보급을 책임
졌기 때문에 그 속에는 비전투 병력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전투 경험 없는 화랑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황산벌에서 열린 5회전의 전투에서, 4회전까지 백제군이 5천 병력으로 5만의 신라군을 농락할 수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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