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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라 본기」
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 본기」흥덕왕 편에서는 흥덕왕(재위
826~836년)이 왕후인 장화부인을 잃은 뒤에
재혼을 거부하고 여자를 멀리했다고 하면서,
그 주변에 오로지 환수(
)들 뿐이었다고 말
했다. 환수란 고자형 내시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이전 시기의 사료에서는 고자형 내시가 등장
하지 않고 서기 9세기 때의 신라 사료에서부터
그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점을
조선시대 내시를 다룬 SBS 드라마 <왕과 나>
이해하려면, 9세기 이전에 신라 문화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검토해야 한다. 9세기 이전에
신라 문화에서 발생한 변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당나라 문화와의 융합, 즉 중국화( 國 )였다.
7세기 중반의 나당연합이 그 계기가 되었다. 당나라와 연합한 이후로 신라 사회는 중국식으로 급속히
개조되었다. 관리뿐만 아니라 여성의 의복까지 중국식으로 바뀌었을 정도다. 신라에서 황제나 폐하에
해당하는 표현들이 사라진 것도 이때부터다. 중국 황제를 받들다 보니 신라 스스로 황제나 폐하 같은
경칭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나당연합 이후의 중국화 분위기 속에서
중국식 내시제도가 신라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렇게 도입된 고자형 내시들이
서서히 성장하다가 흥덕왕 때에 이르러 비로소 역사에 등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고자형 내시에도 두 부류가 있었다. 자연적으로 거세된 사람들과 인위적으로 거세한 사람들이
있었다. 흥덕왕 편에 나오는 내시들은 자연적으로 거세한 사람들이었다. 이때까지도 한국에서는 남성성을
인위적으로 거세하는 풍습이 없었다. 이런 흐름이 고려시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고려 중반
까지의 내시들은 자연적으로 거세된 사람들이었다.
『고려사』
「환관 열전」
에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고려의 엄인( , 환관)들은 본래 일반 서민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천한 노비들이었다. 고려에서는
궁형을 행하지 않았기에, 어렸을 때 개에게 물린 사람들이 이렇게 되었다.”
“개에게 물린 사람들이 이렇게 되었다”
는 것은 고려 내시들이 고자가 된 대표적 원인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 외의 자연적 원인에 의해 고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자연적으로 거세된
사람들만 뽑았기 때문에 내시를 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숫자도 적었을 것이다. 내시가
흔치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조직력도 약했을 것이다. 고려시대 중반까지 한국사에서 강력한 내시들이
출현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사의 제3기 내시들은 인위적으로 거세한 사람들이었다. 굳이 명명하자면, 인위적 고자형 내시라고
부를 수 있다. 몽골의 간섭(1270년)과 함께 그들이 역사에 등장했다. 몽골제국(원나라) 황실에 바쳐진
고려인 고자들이 출세하자 고려 하층민 사이에서 자발적인 거세가 유행한 것이다.
『고려사』
「환관 열전」
에 당시의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잔인하고 요행을 바라는 무리가 이것(몽골에서 출세한 고자들)을 부러워하여 아버지는 아들을 거세
하고 형은 동생을 거세했다. 또 강포한 사람들은 좀 분한 일이 있으면 스스로 거세했다. 불과 수십
년 만에 거세한 사람들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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