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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정초에 왼손가락을 잘라 '복수대의'라 혈서하여 높은 대에 걸어놓고 민족의 봉기를 촉구
하는 혈서투쟁을 전개하였다. 100여장의 혈서를 쓰는 동안 피가 마르자 가슴을 찢어 피를 내어
격문을 써서 겨레의 의거( 擧)를 촉구 하고, 한달 후 다시 장지(
)를 찢어 격문을 써서 군중을
지휘, 선동하였다.
그 후 3.1운동 직전에 왜경에게 피납, 갖은 악형을 당하고 혈서와 의기, 격문 등을 모두 빼았겼
다. 그 뒤 왜경이 찾아와 조선을 합병한 것은 '조선의 요청에 의한 것이니 협조하라.'고 회유하자,
그는 왜경을 몽둥이로 마구 구타하고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2년에는 호별세 통지서가 전달되자 남의 나라를 빼앗은 놈들이 세금까지 내라느냐 노발대발
하고 손가락을 찢어 혈서로 왜왕대정(
)과 총독을 꾸짖는 한시를 쓰고 또 나 대한일민은
세금 안 낸다고 써서 통지서와 함께 왜왕에게 보내라고 반송하였다.
1924년에는 전매령(
)이 내려 담배 경작을 임의로 못하게 하자, 그는 팻말을 써서 꽂고
동리가 공모하여 계속 경작케 하니 왜노가 또 체포하였다. 1933년에는 행정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납치, 늑삭(? :강제로 삭발하는 것)을 하려하자 왼손을 물어뜯어 피를 입에 물어 왜경의 얼굴에
뿜어대는 바람에 늑삭을 못하였다.
그는 항상 상복을 입었으므로 왜경들이 상복을 벗기려 해도 계속 입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왜경이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1937년 당시 여주 흥천면에 거주할 때 왜경이 찾아와 상복을
벗기려 하자 완강히 거부하니, 사상이 나쁘다고 마구 구타해 허리와 다리에 골절상을 입고 여주
감옥에 수감 당하였다.
그는 해방 후에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찾아가 친일 매국노를 처단하여 민족정기를 확립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신탁통치를 반대하여 완전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그는 일평생을 항일 투쟁으로 마쳤고, 왜경이 갖은 악형과 행패로 그를 굴복시키려 했지만
끝내 불굴의 투지로 대한 남의 기개를 만천하에 드높였다. 그의 유고를 아들 김홍제씨가 번역
하여“한월빙설”
을 발간하였다. 2010년 문화원에서는“한월빙설”
을 증간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의
그의 학문과 항일 투쟁의식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에는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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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osan.cult21.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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