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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과 함께 1등에 세 자급(資級)을 올려 받았고,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그 후로도 인조조 국방과
관련한 중요한 자리에는 항상 정충신이 있었다.
1624년(인조 2) 7월 조정에서는 평안병사 자리를 놓고 천거를 하는 기록이 있다.
“정충신이 이 직임에
적합할 것이다.”
라고 하여 평안병사에 제수하였다.
평안병사 정충신은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하였으나 또다시 병으로 인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인조는 정충신을 위해 어약을 하사하는 등 그에 대한 믿음과 애정을 보여줬다.
정충신의 활약은 정묘호란에서도 빛을 발하였다. 청 군대의 진로였던 평산에서 군대를 주둔하고
목책을 설치하며 대비하여 결국 청 기마병이 퇴각하도록 하였으며, 용골성에서 청나라 병사들을 물리
쳤고, 의주에 머물고 있는 청군의 현황을 보고하기도 하였다. 이때 정충신은 신병이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 전투에 참여하여 인조 5년 9월에 포상을 받았다. 그 후로도 부원수 정충신은 국방의 안전을
돌보는 직책에 있으면서 외적의 동태를 살피고 백성들의 안위를 보살피는데 최선을 다했다.
1633년 조정에서 후금에 대한 세폐를 거절하고 청과 절교할 것을 결정하여 이 사실을 청조에 알리
려고 김대건을 사신으로 보내자 정충신은 재고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당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장연으로 이배되었다. 그러나 곧 유배에서 풀려나와 포도대장·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는데,
병이 심해져 1636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천문, 지리, 복서, 의술 등 다방면에 해박하고, 청렴하기로도 이름이 높았다. 문집은《만운집》
이 있고,
저서로《백사북천일록(白沙 遷日 )》
《금남집(錦南集)》등이 전해진다.
정충신이 지곡면 대요리의 진충사에 배향된 것은 묘소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금성 정씨는
전라남도 광주에 세거하고 있었는데, 정충신이 1633년 당진에 유배된 인연으로 말년을 서산 대산에서
은거하다가 대요리의 지세를 살펴보고 묘소를 정하면서 그 자손이 이 지역에 세거하게 되었다. 이는
정충신의 유사(遺事) 중 1633년(인조 11)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어 있을 때 서산 마힐봉(현재의
국사봉) 아래의 한곳을 정해놓고 자제들에게 반드시 이곳에 장사 지내라고 한 말에서도 확인된다.
한편 대요리 일대는 이괄 집안의 땅이었는데, 정충신이 이괄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후 이 지역을 사
패지로 받게 되었다고 한다.
정충신의 유언대로 대요리 국사봉 산록에 묘소를 정하고, 대요리에서 금성정씨 집안의 가계를 이은
것은 정충신의 아들 반(磐)·빙( )·문( ) 3형제 중 차자인 정빙(鄭 )이었다. 정충신이 죽은 뒤 29
년 만인 1685년(숙종 11)에 충무공(忠武公) 시호를 받고, 영정과 위패를 종손이 보관하면서 제향을 드
렸는데, 한 때 도난당하기도 하는 등 보관이 허술하여 당진 정미면에 거주하던 5세손 정세오(鄭世奧)
가 사당을 지었다가 1897년 9세손 정세칠(鄭世七)이 현위치인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로 이건하였다.
이후 몇 차례의 중수와 개축을 했고 이 같은 단장을 통해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206호로 지정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우내에 영정, 투구, 갑옷, 향합, 향로 서군사령기 등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다.
※ 출 처 : 서산의 문화유적
※ 332호(6월호) 8P 첫째줄 인지면 둔당리를 인지면 애정리로 정정합니다.
http://seosan.cult21.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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