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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녀를 둠으로써 이후 신통리에 제주고씨 집안에 점차 후손이 늘게 되었다. 고석구의 묘는 마을 뒤에
마련한 종산에 모셨다.
참고로, 이 마을에 가장 먼저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 제주고씨에 관해서 구체적인 사항을 확인할 수
없다. 현재 온양시내로 이주한 후손(약 80세)이 있기는 하나 자세한 내력을 모르고 다른 후손들도 거
의 마을을 떠나 있는 형편이다. 마을 뒤에‘시제청’
이라고 하는 묘가 있는데 9대조 쯤 된다고 한다.
상석에‘제주고공지묘 김해김씨부좌 ~~~ 신축11월일’
이라 되어 있으나 이것만으로는 묘 주인을 알
아낼 수 없음이 아쉽다.
[4] 곡부공씨 공부
| 孔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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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곡부공씨(曲阜孔氏) 63세이며 형조판서공파 아산시 지역, 둔포면 신남리 입
향조이다. 선대는 경남 창녕 지역에 거주해왔다. 현재 득산동에 거주하는 후손 77세(世) 공용수(孔龍
洙, 78세)씨의 14대조이다.
공부는 태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파조 공사문(孔斯文)의 5세손이다. 문과 급제 후 감찰 등을 거쳐
세종 때 호조참판을 역임한 공종주(孔宗周)의 현손이고 사헌부 감찰을 지낸 공보석(孔輔碩)의 증손이
며 세종 때 거제현령을 지낸 공계손(孔季孫)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공세원(孔世元)이며 어머니는 확인
되지 않는다.
공부는 무신으로 주부(主簿)를 지냈으며 부인은 창녕조씨(昌寧曺氏)이다. 그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확인되지 않으며 언제 왜 신남리로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또한 그가 실제 입향조라는 근거를 찾
을 수도 없다. 인접한 마을인 둔포면 송용리 부용단에 그의 아버지 공세원과 그의 아들인 공만형(孔
萬亨)의 단이 있어서 그가 아닌 아버지 혹은 아들이 입향조일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신양1리에 사는
후손 77世 공군석(孔君錫)씨가‘14대조를 시제 모신다’
고 하고 족보에 공만형과 관련하여 후손이 둔
포면 산전리에 거주한다는 기록 등이 있어서 일단 공부가 처음 자리 잡은 것으로 추정한다. 공부의
묘는 둔포면 신남리에 있다.
공부는 아들 만형(萬亨), 손자 적(績)을 두었다. 증손자 공희성(孔希聖, 1567~?)은 1609년(광해군1
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기도 하였다.
그의 후손들은 신남리를 중심으로 거주해왔는데 공군석씨의 7대조 때 신남리 일대에 전염병이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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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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