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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포 1리의 최고령자는 83세의 김종환 할아버지이시고,
백석포 2리의 최고령자는 78세의 김춘식 할아버지이시다.
- 호당 평균 소득
백석포1리는 호당 년 평균소득이 1,200만원, 백석포2리는 호당 평균소득이 1,100만원 정도이
3)
자연 경관
백석포리는 전엔 배가 드나드는 포구가 있어서 자연적으로 상업과 어업이 발달하였으나 아
산만 방조제 축조로 포구는 없어지고 넓은 농지가 조성되어 현재는 벼농사를 주로하는 부농
부락이 되었다. 안말은 넓은 들판이 갯벌이었으나 간척사업으로 인해 논으로 바뀌고, 백석산
한쪽의 절벽이 파도에 침식되어 만들어졌다는 것이 바닷가였다는 것을 잘 알수 있다. 해풍
의 영향으로 바람이 많으며 가옥은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4)
마을 변천 과정
백석포리는 본래 아산군 이북면의 지역으로서 백석포가에 있으므로 백석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백석포리라 하였으며 정조때 수원 백성들이 화산성을 쌓는데
그 신역을 피하여 이곳에 모이어서 큰 마을을 이루었다 한다.
5)
지 명
말 : 백석산 기슭 등마루에 있는 마을
촌 : 월랑산 밑에 있는 마을
잔 : 새말 앞에 있는 들
터 : 안말 앞에 있는 마을.배를 타는 나루터가 있다.
말 : 점촌 아래에 새로 된 마을
말 : 새말 안쪽에 있는 마을
월랑산
: 백석포 말 포구에 크고 흰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이름을 빌어 흰돌
' 이라고 불리
었으며, 흰돌이 있는 포구라 하여 백석포라 하고, 또 월랑산 기슭에 있는 마을도 백석포라
하게 되었다.
산(백석산) : 지금의 백석포 회관 뒤에 있는 마을 뒷산, 이산에 산재당(
堂)이 있으며,
청일전쟁 때 청국군이 이 일대에 44일간 주둔하고 있었고, 3ㆍ1운동 당시 백석포 주민들이
봉화를 올렸다고 한다.
구례뻘
산 : 월랑산 서쪽 갯벌 쪽 농로를 따라가다 보면 구성리 가기전에 있는 조그마한
산. 옛날에는 바위 밑에서 굴을 따던 곳이라 하여 구례뻘이라 불렀다 한다.
서낭당
고개 : 구례뻘에서 새별리로 가던 산 고개에 서낭당이 있었다.
구산
고개 : 백석포에서 구성리로 넘어가는 고개.
노루목
들 : 백석포 초등학교 맞은 편에 있는 들.
용난수
들 : 와우리 입구에서 구산 고개에 이르는들.
정샘
들 : 백석포 초등학교를 지나 와우리 입구에 이르는 들.
고전
들 : 백석포에서 신운리로 가다가 오른편에 속해있는 들.
방죽안
들 : 용난수 아래에서 노루목까지의 들.
방죽아래
들 : 방죽아래에 있는 들로서, 시운리로 나가다 보면 왼편에 있는 들.
원논
들 : 백석포 마을앞에 있는 돌.
샘골
들 : 월란산과 동산 사이에 있는 들.
새앙골
: 안말 북동쪽에 있는 들. 샘이 있다.
간사지
들(속펄) : 구성리에 거주하는 이석곤씨가 미국의 원조 농산물을 이용해 제방을 만
들어 개간하여 농사짓다가, 아산호 방조제가 완공됨에 따라 120만 평의 옥토가 된 들이다.
모원다리
: 백석포에서 모원리로 가던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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