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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숙종 20)에 다시 대사간에 올랐으며 붕당을 감싸다가 청렴하고 검소한 절조가 있어 화를 면하였
다. 1695년(숙종 21) 7월 부호군으로 염근리(廉謹吏-사후에 청백리)에 뽑히고 가자(가자-직급을 올려줌)
되었으며 대사간 직책을 계속 수행하였다. 1701년(숙종 27) 장희빈의 사사를 극력 반대하는‘자모록소(子
母鹿疏)’
를 올렸다가 홍원(洪原)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1706년(숙종 32) 복관되고 조부 학년(鶴年)과 함께 대전 회덕의 용호서원(龍湖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
는 문안(文安)이며, 묘는 아산시 송악면 동화리 분토골에 있다.
[3] 강세보
姜世輔
<1647(인조 25년)~1714(숙종 40년)>
조선 후기 문신이다. 본관은 진주(晉州)로 은열공 민첨(民瞻)의 17세손이다. 복호령(伏虎嶺) 창경(昌慶)
의 증손이고 증 사복시정 형(泂)의 손자이며 증 좌승지 여상(汝尙)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전주 이(李)씨이
며 부인은 진주(晉州) 소(蘇)씨이다. 자는 덕장(德長)이고 호는 소옹(素翁)이다. 1675년(숙종 1) 생원시에
합격했고 1681년(숙종 7) 문과에 을과 6위로 급제했다. 죽산군수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며 사후에 가선
대부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그가 받은 여러 교지와 호패가 남아 있으며 문집 2권이 전해진다. 묘는 아
산시 송악면 동화리 동배골 종중 묘역에 있다.
[4] 강원
姜垣
<1717(숙종 43년) ~ 1797(정조 21년)>
조선 후기 문신으로 온양 사람이다. 본관은 진주(晉州)다.
생부(生父)는 일리(一理)이며 병조참의를 지낸 일규(一珪)의
계자(繼子,系子)로 들어갔다. 자는 군필(君弼) 호는 만향재
(晩香齋)이다. 부인은 청주 한(韓)씨이다. 천거에 의해 통덕
랑(通德郞)이 되었으며 1780년(정조 4)에 문과 식년시에 을
과(乙科)로 합격하여 1788년(정조12)에 헌납(獻納), 1790년
(정조 14)에 승지가 되었다. 가의대부(嘉義大夫) 공조참판
(종2품) 겸 동지경연 의금부지사 춘추관 영사(春秋館 領事)
를 지냈다. 문집으로《만향재집》3책을 남겼다. 묘는 온양군
동면 약수동(배방면 회룡리) 유좌에 있었으나 1985년에 송
<강원의 묘비>
악면 동화리 동배골의 종중 묘역으로 옮겼다.
[5] 강일규
姜一珪
<1684(숙종 10년) ~ 1772(영조 48년) >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온양 출신이며 성장한 이후 주로 서울에서 살다가 말년에 송악면 동화리 배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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