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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아버지는 현구령(玄九齡), 어머니는 신평이씨(新平李氏)다. 권상하
하고, 1739년(영조 15) 집의에 올랐다. 1741년(영조 17) 부호군이 되었는데, 이때 주자를 보
의 문인으로 ‘강문 8학사’의 하나인데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낙론(洛論)
은 춘추사(春秋祠)의 송시열 영당에 추가로 봉안할 것을 주장하다가 삭직을 당했다. 이듬해
을 주장하였다. 그는 본래 천성과 자품이 밝고 학문이 순수하고 독실하여
다시 기용되자 군자감정이 되었다. 1743년(영조 19) 사과, 1749년(영조 25) 진선, 1754년
이간과는 뜻이 같고 도가 부합하였다. 그의 학문은 주로 성리학에 힘썼으
(영조 30) 서연관, 이듬해에 찬선을 차례로 역임하고, 1760년(영조 36) 대사헌에 특채되었
나 또한 예학에도 정통하였다. 영조 때 유일로 천거되어 장릉참봉, 익위
으며, 1763년(영조 39) 지돈령에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다. 저서로는 『병계집(屛溪集)』, 「화
병계집
사세마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관봉문답(冠峰問
양존주록(華陽尊周錄)」이 있고, 죽은 후 송시열의 영정을 봉안한 성주의 노강(老江)서원에
答)』, 『관봉유집(冠峰遺集)』이 있고, 묘소는 예산읍 관작리에 있으며, 그
권상하와 함께 영정이 봉안되었으며, 묘소는 덕산에서 봉산 궁평리로 옮겼다.
의 서재는 거무실 관모봉 중턱에 있었다고 전하나 확인할 수는 없다.
그는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는 호론의 입장에서 한원진과 견해를 같이 하였다. 그는 인물
그는 사람과 동물이 다 같이 오상(五常)의 덕을 얻었지만, 다만 그 기
성동론(人物性同論)이 성(性)과 리(理)의 구분이 자세하지 못한 데서 나온 잘못이라 지적하
질지성 때문에 치우치고 온전함의 구별이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인성
고, 성과 리의 구분으로 말하면, 리는 율곡 소위 이통(理通)의 리이며 성은 기국상(氣局上)
과 물성이 다르다는 한원진의 주장을 비판하여 한원진은 오상을 잡박한
의 리라고 하였다. 따라서 성은 기질의 제약을 받는 기질지성이므로 사람과 생물은 각기 그
성으로 보았으나, 주자가 말한 천명지성은 기품은 섞지 않은 본연지성만
성이 다르다 하였다. 그는 기품의 치우침과 온전함에 따르는 기질지성을 사람과 사물의 본
을 말한 것이고, 또 오상의 덕은 천명의 성을 해석한 것이므로 마땅히 기
관봉유고
연지성이라고 하여 사람과 물성을 다른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인성은 인의예지신 오상
???출처:한국고전번역원
를 섞어서는 안 될 것이라 반박하였다.
(五常)을 다 갖춘 것이고, 물성은 오상이 치우쳐 없는 것이기 때문에 호랑이의 인(仁), 개미
윤봉구(尹鳳九: 1681~1767)의 자는 서응(瑞膺), 호는 병계(屛溪), 구
의 의(義)라고 하는 것들은 오상의 인의에 비슷하지만 인의(仁義) 그 자체는 아니라고 설명
암(久庵), 본관은 파평,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병계(屛溪)’라는 호는
하였다. 그는 인성과 물성의 같음을 주장하는 낙론계의 박필주(朴弼周), 이재(李縡) 등과 여
가야산 계곡을 가리키는 옥병계(玉屛溪)에서 연유한 것이다. 조부는 참
러 차례 논변을 벌였다.
판 비경(飛卿)이고 아버지는 명운(明運)이며 우참찬 봉오(鳳五)의 형인
한홍조(韓弘祚: 1681~1712)의 자는 영숙(永叔), 호는 암촌(岩村), 손재(損齋)다. 아버
데, 덕산의 서부 거동(車洞)의 옛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지 한윤원과 어머니 전의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1681년(숙종 7) 예산현 현내 봉암(현 예산
이름이 높았던 외조부 이진(李晋)에게서 글을 배웠다. 이때 홍혜백(洪惠
읍 암하리, 산성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불행하게도 3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는데 충북 제
伯), 유자성(兪子成), 이서구(李敍九), 여사신(呂士新) 등과 교유하였는
천 청풍의 권상하 문하에 들어가 강문8학사로 총애를 받았다. 저서로는 「강상문답(江上問
答)」, 「동유록(東儒錄)」, 「구봉선생래파변(龜峰先生來派辯)」이 있으며, 묘소는 처음 예산
데, 이들은 모두 당시의 명성이 자자했던 이들이다. 이때부터 그는 학문
적으로 사우들 간에 인정을 받아 학문적인 논란이 생기면 언제나 그의 견
봉암에 안장하였으나 봉산 궁평리로 이장하였다.
해에 따라 결론이 내려졌다. 그는 1710년(숙종 36) 권상하의 문하에 들
4)우계학파
어가 그의 촉망받는 제자가 되었고, ‘강문 8학사’의 한 사람으로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는 호론(湖論)을 주장하였다.
그는 1714년(숙종 40) 진사가 되고, 유일로 천거되어 1725년(영조 1)
조익(趙翼: 1556~1613)의 자는 비경(飛卿), 호는 포저(浦渚), 존재(存齋), 본관은 풍양
청도군수가 되었다. 1733년(영조 9) 사헌부지평, 이듬해에 장령을 역임
(豊壤)이다. 서울 창신동에서 태어났는데 9살 때 김계희(金繼熹)에게 글을 배우고, 15살에
3.선비의고장,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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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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