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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조맹부의 필법을 전적으로 사용하여서 속됨을 면치 못하였다. 또 안평대군은
귀공자로써 이 필법을 맨 먼저 창시하여 한 시대를 눈부시게 하였는데, 이로 말
미암아 열조(列朝)의 어필(御筆)이 모두 이 필법을 사용하니, 드디어 나라의 습
속이되었다.이몇해전에는온세상이쏠리어서왕희지,조맹부라고까지하였
고, 또는 안평대군의 획법으로써 조맹부의 필체를 썼다고 하니, 웃을 수밖에 없
다.라고하였다.
자암 김구는 해서는 비루하여 볼 만한 것이 못되는데, 대자(大字)와 행서,
초서는 필법이 자못 훌륭하나 필력은 둔하고 느리다. 일찍이 홍산(鴻山)유세모
(1687년~?)의 집에서 큰 글씨 한 폭을 보니 의젓하게 뛰어나서 그의 글씨도 쉽
게평론할것이아니었다.
봉래 양사언은 초서는 호탕하여 탈속하였는데 언뜻 보면 장우(張遇)보다도
뛰어나고 왕희지를 지나칠 것 같으나 재기는 있어도 학문이 없고 겉보기는 근사
하여도뼈대가없어서대가가되지못하였다.
석봉 한호는 재주와 학문이 높지 못하였으나 연습을 쌓은 공으로 비록 옛사
람의 획법은 알지 못하였어도 자연히 서로 합치하였는데, 처지가 미천하였던 까
닭에 관청의 서사(書寫)에 일정한 법식의 구속을 받았었다. 해서는 더욱 비루하
였으나필력은볼만하였고,행서·초서의잘된곳은웅장하고힘차서송·원의
명필보다도뛰어났다고하여도잘못이없을정도였다.
이광사의 4대가에 대한 평가는 모든 부분에 대하여 극찬한 것은 아니었다.
이광사가 4대가를 선정한 기준은 4대가에 대한 논평에 뒤이은 백하(白下)윤순
(1680~1741년)에 대한 평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광사는 윤순의 글씨에 대해
“윤순은늦게나서중국의획법을독학하였는데,서체가신기·절묘하고재사(才
思)가교묘,화려하여동방사람의비열함을완전히씻었으니후학을개발한공이
4대가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고 한 것이다. 즉 이광사가 볼 때 윤순은 명나라가
망한 이후에 태어나서 독학으로 일가를 이루었는데, 명나라 명사들의 평가를 받
지는못하였지만4대가에못지않은평가를받을수있었을것이라고한것이다.
그것은 4대가의 선정이 필력 외에 명나라의 명사들에게 어느 정도의 평가를
받았는지, 또는 받을 수 있었겠는지가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안평대군과 한호는 명나라에 필명을 날렸
기 때문에 선정에 무리가 없었을 것이지만 나머지 2대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있다.
108│묵향의본향에서조선4대명필자암김구를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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