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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정씨
鄭氏
< ? ~ ? > -심해의 처
조선 중기의 열녀로 본관은 동래이다. 아산현에 살던 심해(沈諧)의 처다. 정유재란(1597년) 때에 배를
타고 영광으로 피난하던 중 해상에서 왜적선에 에워싸이자 위기를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세 살 난 아
들 광렴(光 )을 노비 복이(福伊)에게 부탁하고 스스로 바다에 빠져 죽었다. 이때 같은 배에 있던 다른 부
녀자들도 이를 보고 바다에 뛰어드니 모두 12명이었다. 이 내용이《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에 실렸으니 후
에 그의 손자 과(科)가 청해서 1693년(숙종 19)에 정려가 내려졌다. 음봉면 산동리 뫼골에 있는 정려 안에
는 그의 정려와 정려비 외에‘12열부기(烈婦記)’
도 있다.
[63] 정씨
鄭氏
<1649(인조 27년) ~ 1728(영조 4년) > -오도빈의 처
조선 후기의 효부(孝婦)로 신창현에 살았던 선전관 오도빈
(吳道彬)의 처다. 본관은 동래(東萊)며 아버지는 은( )이고
어머니는 거창 신(愼)씨이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지극 정
성으로 모셨기에 1736년(영조 12)에 정려가 내려졌다. 신창
면 신달1리에 정문이 세워졌는데 1865년에 부서진 것을
1934년에 중수하고 다시 2002년에 중수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효부 동래 정씨 정려>
조상우
- 명인편 참조
[64] 조씨
趙氏
< ? ~ ? > -맹희의 처
조선 후기의 효부(孝婦)다. 신창현에 살았던 맹희(孟喜)의 처였다. 본관은 양주(楊洲)이고 부사정(副司
正) 눌(訥)의 딸이며 부사과(副司果) 자유(子柔)의 여동생이다. 은일학자 시암 상우(相禹)의 고모이기도 하
다. 일찍 과부가 되어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고 아들을 법도 있게 가르쳤다. 당시 사람들은 맹자
의 어머니에 비유했다. 현종 때에 특별히 정려를 내렸다. 정려는 신창현 북면 가리(加里-현재의 신창 가
내리 가리울)에 세워졌는데 지금은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옮겨져서 효부리비와 함께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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