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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일본어 아산군지
. 20일 일본공사는 조선정부에 향해 3일 이내로 재선 청
경고를 발송하였다
병을 구축할 것을 강제하고 만일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일본은 별도로 이를
일으킬 뜻이 있다는 것을 이르고 전장은 급하게 되어 아산에 있는 병은 자
, 자비의 신중을 기하라고 하다. 즉, 섭사성은 주력으로 성환을 점령하고
1,000을 가지고 천안으로 이동하였다. 섭(?)의 인솔하는 병력
스스로 병력
2,040 포8문을 26일 새벽 아산을 출발 오전 9시 성환에 도착, 다음 27
은 병
(江自康)은 1,000의 병력을 이끌고와 합류하였다. 위의 병력
日 오전 강자강
1,000 및 전
을 배치하는데 주력부대의 대부분을 성환부근에 타의 일부 약
80의 초병을 직산에 두고 각 방어공사를 하여
포병을 우헐리 부근에 별도
7월 29일에 이르다.
일본군의 남하를 기다려
2) 일본혼성여단의 남진
(大島義昌之)이 통솔하여 경성에 있
일본혼성여단은 육군소장 대도의창지
. 위기 목척에 다급해져, 한정의 의뢰의 유무에 관계없이, 우선 아산의
었다
(평양 이북의)에 대비하고자 한 것이
병력을 치고 속히 돌아가 북방의 청병
25일 경성(京城), 용산(龍山), 인천(仁川) 등에 각 소요되는 병력을 배치하
. 당시 직접 여단장의 수하에 있는 병력은 보병,
고 출발 남하하기로 결정함
, 포병, 공병, 병참, 전신 급양의 제대를 합하여, 전투 요원 3000, 산포8,
기병
47, 그 밖에 병참 동수송 군부등이다. 여단장은 척후 등의 보고에 의해
기병
, 제부대를 수원에 집합시켜 무전중좌(武
청병의 주력은 아산에 있음을 알고
: 다께다)가 인솔하는 전위대의 엄호에 의해, 별도 동로 독립지대를
田中佐
(銅雀津)으로부터 용인(龍仁), 안성(安城)을 거쳐 직산으로 나와 여단
동작진
. 25日 인천으로부터 혹은 아산방면에
의 좌측을 경계하게끔 하도록 하였다
포성이 있음은 해전 아닌가 하는 보고를 받고 즉일 아산방면의 정찰을 명하
여 무전전위사령관으로 하여금 기병을 수원으로 보내게 하고 제 부대는 남
. 26일 본대 수원(水原)도착, 동일 오전 3시 남양(南陽), 아
진의 길을 떠났다
(牙山), 천안(天安)의 각기병 척후에 보탬에 있어, 장고 척후를 보내 공주
(公州), 천안에 청병도 없고, 성환(成歡) 및 소사장(素沙場)에 약간의 청병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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