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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1519년(중종 14)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신진사림과 뜻을 함께 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거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로 인해 이정(李貞)도 실직이 아닌 병절교위로 임명만 되었고 일찌감치 벼
슬의 뜻을 접었다.
가정 형편도 어려워서 1553년(명종8-추정)경에 처가(妻家)가 있는 아산 백암리(뱀밭)로 들어와 살
기 시작했다. 그의 부인도 초계변씨(草溪卞氏)이며 현감 변수림(卞守林)의 딸이다. 그는 비록 벼슬이
나 공적에서 크게 드러나는 일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큰 뜻을 품었기에 네 아들의 이름을 중국의 삼황
오제(三皇五帝)와 하(夏)나라 왕의 이름을 써서 지었으니 희신(羲臣)·요신(堯臣)·순신(舜臣)·우신
(禹臣)이었다. 희신과 요신은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떴으나 이들 대(代)에 참판공파(희신), 율리공파(요
신), 충무공파(순신)로 나뉜다. 그의 후손들은 나라를 위해 큰 공을 많이 세웠다. 그는 이순신이 함경
도에서 군관으로 근무하던 1583년 11월에 향년 73세로 졸하였고 사후에 이순신의 공적으로 순충적덕
병의보조공신(補祚功臣) 대광보국 숭록대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덕연부원군(德淵府院君)에 봉해졌다.
묘는 음봉 삼거리 종중 묘역에 있다.
그의 후손은 아산시 각지에 널리 분포되어 번창하였으며 그 중에서 충무공파가 가장 번창하였다.
참고로 덕수이씨 시조인 이돈수(李敦守)등 3대의 단을 1968년에 득산동에 건립했으며 지난 2007년
에 음봉면 삼거리로 옮겨 모시고 있다.
-이정의 묘와 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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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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