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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앓자 옷끈을 풀지 않고 밤낮으로 기원하며 모셨다. 마침내 위중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손가락을 깨물
어 피를 내어 입에 넣어 드렸더니 깨어나서 며칠을 더 살다 운명했다. 3년간 상복을 벗지 않고 여막에 기
거하며 슬퍼했고 이후에도 공경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모셨다. 그 효행을 아는 향교 유림 윤방·김치효(金
致斅) 등 128인이 임진년(1892)에 아산현감에게 효자 정려를 세울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묘는 영
인면 월선리에 있으며 그 후 단기 4302년(서기 1969)에 함양 박동은(朴東殷)이 비문을 지어 영인 월선리
에 효자비를 세웠다.
[61] 정수징
鄭壽徵
, 1691(숙종 17) ~ 1747(영조 23) >
조선 후기 숙종 때의 효자로 신창현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조석마다 맛
있는 음식으로 부모를 공양하고 외출 후 귀가할 때에는 반드시 부모에게 고하였다. 추운 겨울 밤이면 부
모가 계신 방이 혹시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지 않았는지 염려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비록 공무가 바
쁘더라도 먼저 부모에게 문안을 드린 다음에 관부(官府)에 들어갔다. 부모가 병이 들면 반드시 효심이 부
족한 것으로 알고 추위를 무릅쓰고 목욕하고 하늘에 기도하여 자기 몸으로 병을 대신하기를 빌었다. 약은
반드시 먼저 맛보았고 낡은 옷은 친히 빨았다. 상을 당하였을 때 벽용호절( 踊號絶)하여 몸이 상하였으
나 끝까지 예를 다하였다. 영조4년(1728) 무신년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죽음으로서 싸워 의
(義)로 막기로 결심하고 무리를 이끌고 군경(郡境)을 지켰다. 누가 충효를 말하면 반드시 화난 소리로 꾸
짖어 이르기를“충효라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일이다. 그 탁이(卓異)함이 나의 선조같이 한 다음에 비로소
의논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했다.
영조23년(1747) 3월 21일 향년 56세에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서 자질(子姪)
을 모아 놓고 음식을 함께 하며 즐긴 다
음에 노비에게 분부하여 말에 안구(鞍具)
를 갖추라하고 말하기를“사람의 죽음은
모두 정해진 때가 있는데 나는 오늘 영거
(永去)하니 너희들은 각기 스스로 잘 있
거라.”
하고 말을 마친 뒤 노비에게 말고
삐를 잡으라 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1854년(철종 5)에 효자 정려가 내려지
고 가선대부 한성부좌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추증되었다. 당시 규장각 직각
연안 김씨 김시연(金始淵)이 쓴 정문 현
<정수징의 효자 정려>
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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