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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율곡학파
찬 우계 성혼과 함께 6년이란 세월을 유배지 옥구에서 지내야 했다. 그가 서거한 후 1612년
(광해군 4) 승정원도승지, 이조판서, 1630년(인조 8) 순충보조공신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세자이사 아흥군을 추
율곡학파는 기호학파의 주류로서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愼
獨齋 金集)의 문하에서 배출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
증 받았다.
吉), 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 등이 중심 인물로 호서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송시
이후 호서의 많은 선비들이 공의 학문과 행실의 순수함과 충효의 절의는 만인의 귀감이
되었으며, 따라서 공을 서원에 배향해야 한다고 발론하니, 태학의 선비들도 이를 적극 지지
열의 적전인 수암 권상하(遂庵 權尙夏)는 충북 제천 청풍에서 강학을 하였는데, 많은 제자
하여 1800년(정조 24) 3월 덕산의 회암서원에 배향되었다. 그는 재종조가 되는 북애 이증의
들이 그의 문하에 모여들었다. 특히 외암 이간(巍巖 李柬),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을 비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땀에 흠뻑 젖어 바지가 썩을 정도로 학문을 연마하여 훗날 성리학
롯한 이른바 ‘강문 8학사’들은 사람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 하는 성리논쟁
에 깊은 경지를 드러냄으로써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 관직에 있을 때는 자신에게
을 벌였다. 안민학은 16세기 율곡의 문인으로 활동하였고, 현상벽, 윤봉구, 한홍조는 권상하
닥칠지도 모르는 위험을 피해가지 않고 불의한 일에 대해 목숨을 걸고 상소를 올려 잘못을
의 문인으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 앞장섰던 예산 출신의 유학자들이다.
시정하려 힘썼다. 문집으로 『취암실기(醉庵實記)』가 전하고 있으며, 예산군 봉산면 봉림리
안민학(安敏學: 1542~1601)의 자는 이습(而習), 호는 풍애(楓厓), 본관은 광주인데 율
묘하에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곡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의 목표가 있었다. 약관 때부터 유학에 종사하여
이경전(李慶全 :1567~1644)의 자는 중집(仲集), 호는 석루(石樓), 본관은 한산이다. 아
과거 공부에는 뜻을 두지 않고 경서, 사기 및 제자백가에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필법이
계 이산해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조언수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
뛰어나고 문장에 능해 당대 사림들의 존경을 받았다. 1561년(명종 16) 학행으로 추천을 받
제하여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95년(선조 23) 한성참군, 1596년에는 예
아 원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고, 그 후 부모 봉양을 위해 희릉참봉, 사직서참봉을
조좌랑, 병조좌랑을 지냈고, 1608년(선조 41) 정인홍 등과 함께 영창대군의 옹립을 꾀하는
역임했다.
소북 유영경(柳永慶)을 탄핵하다가 강계로 귀양을 갔다. 이해 광해군이 즉위하자 풀려나와
1580년(선조 13) 학행이 뛰어난 사람을 6품관에 임명할 때 선발되어 감찰이 되었으며,
충홍도, 전라도의 관찰사를 지내고, 1614년(광해군 6)에 자헌대부에 올랐다. 이듬해 의정부
이어 대흥현감을 거쳐 1583년(선조 16) 아산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이어 현풍현감, 태인현
좌참찬, 지중추부사, 형조판서 겸 오도도순찰사에 올랐다. 1616년 다시 6도체찰사를 겸했
감을 지내고 사직, 1592년 임진왜란 때 소모사(召募使)가 되어 군량의 수송을 맡고, 후에
다. 1618년(광해군 10) 한평군을 습봉하고 좌참찬에 올랐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
사도시첨정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홍주에 은거하였다. 뒤에 제학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어나자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의 책봉을 요청하였다. 이어 한평부원군에 진봉되고,
문정(文靖)이다. 그는 타고난 바탕이 순수하고 바르며 몸가짐이 정확하였는데, 더욱이 『심
1627년(인조 6) 정묘호란이 일어나 왕이 강화도로 피난갈 때 호종하였고, 1636년(인조 14)
경』과 『근사록』 등 성리서를 깊이 연구하고, 반드시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고 도를 들으면 독
병자호란이 일어나 다시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이 공로로 승록대부 판돈
실히 믿고 용감하게 실천하였다. 그러므로 율곡은 칭찬해 말하기를, ‘이만한 사람은 나도 보
령부사에 올라 문형(文衡)에 천거되었다. 1637년(인조 15) 장유(張維), 이경석(李景奭) 등
기가 드물다.’고 하였다. 또 성품이 자효(慈孝)하여 날마다 관대를 갖추고 가묘(家廟)를 참
과 함께 삼전도의 비문 작성의 명을 받았으나 병을 빙자하여 거절하였으며, 1640년 형조판
배하며, 모친을 봉양하는 데 사랑과 공경이 지극하였고, 매번 생일날이면 우계와 율곡 두 선
서를 지냈다. 문필이 뛰어나 이름이 높았으며, 저서로는 『석루유고(石樓遺稿)』가 있다.
생이 반드시 참석하여 헌수하였고, 중봉 조헌도 그의 도학을 매우 칭찬하였다. 문집에 『풍애
또한 한말 유학자로서 항일 의리를 지킨 수당 이남규(李南珪, 1855~1907)도 한산이씨
집(楓厓集)』이 있고, 덕산의 회암서원에 배향되었다.
가 배출한 인물이다. 그는 이산해의 12대손이 되고, 이경전의 11대손이 된다.
현상벽(玄尙璧: 1673~1731)의 자는 언명(彦明), 호는 관봉(冠峰), 본관은 팔거(八?)인
3.선비의고장,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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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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