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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이 되었지만 합당치 못한 일이 있어 벼슬을 버리고 가버렸다.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과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을 따라 노닐며 서로 마음이 맞아
아주 기뻐하고 시사(詩社)를 결성하였다. 달은 한창 소장공(蘇長公)의 시법을 본받아, 그
요체를 터득하여 한번 붓을 잡으면 문득 수백 편을 적어냈으나 모두 농섬(?贍)하여 읊기
에 좋은 시들이었다.
하루는 사암(思庵, 박순의 호) 정승이 달에게 말해주기를,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 하는 것이 정도가 되네. 자첨(子瞻, 소식의 자)의 시는
호방(豪放)하기는 하지만 이미 당시의 아래로 떨어지네.”
하였다. 그리고는 시렁 위에서 이태백(李太白)의 악부(樂府)·가음시(歌吟詩),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近體詩)를 찾아내서 보여주었다. 달은 깜짝 놀란 듯 정법이 거기
에 있음을 알았다. 드디어 전에 배운 기법을 완전히 버리고, 예전에 숨어살던 손곡의 전
장(田庄)으로 돌아갔다.
문선(文選)과 이태백 및 성당(盛唐)의 십이가(十二家)·유수주(劉隨州)·위좌사(韋左史)와 백
겸(伯謙)의 당음(唐音)까지를 꺼내서 문을 닫고 외웠다. 밤이면 날을 새운 적도 있었고,
온종일 무릎을 자리에서 떼지 않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5년을 지내자 어렴풋이 깨이
쳐짐이 잇었다. 시험 삼아 시를 지었더니 어휘가 무척 청절(淸切)하여 옛날의 수법은 완
전히 씻어졌었다.
그리하여 당나라 여러 시인들의 시체(詩體)를 본받아, 장편·단편 및 율시·절구를 지어냈
다. 글자와 구절을 단련하고 성음(聲音)과 운율을 췌마(?摩)하면서, 법도에 부당함이 있
으면 달이 넘고 해가 가도록 개찬(改竄)을 거듭하였다.
그러한 노력을 기울여 10여 편을 지어서 비로소 세상에 내놓고 여러분들 사이에서 읊자,
모두 감탄해 마지 않으며 깜짝 놀랬었다. 최고죽·백옥봉 등도 모두 따라갈 수 없다고 하
였고, 제봉(霽峯, 고경명의 호)·하곡(荷谷, 허봉의 호)과 같은 당대의 시로 이름난 분들이
모두 성당풍의 시를 짓는다고 추켜 세웠다.
그의 시는 청신(淸新)하고 아려(雅麗)하여 수준높게 지은 것은 왕유·맹호연·고적(高適)·잠
삼(岑參)에 버금하고, 수준이 낮은 것도 유장경·전기의 운율을 잃지 않았다.
신라·고려 이래로 당시를 지었다고 하는 사람 중 아무도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정말
로 사암(思庵)이 고무시켜 준 힘이었으니, 그건 진섭(陳涉)이 한고조(漢高祖)의 창업을 열
어준 것이라고나 할까.
달은 이 때문에 이름이 우리나라에 울렸고, 귀하게 여겨져 그의 신분은 놓아두고도 칭찬
해 마지 않는 분들로 시문에 뛰어난 3~4명의 거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속인들 중에는 증
오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줄줄이 이어있어, 여러번 더러운 누명을 덮여 씌우며 형벌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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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향토문화(洪州鄕土文化) 제3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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