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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울 종로구 연건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나 그의 향저(鄕底)와 선영(先
塋)은 예산 신암면 종경리에 있었으며 그의 공가(孔家) 역시 그곳에 근기(根基)
가 있다. 자암은 6세 때 이미 석류시(石榴詩)를 짓고 8세 때에는 오작교시(烏鵲
橋詩)를 지을 만큼 신동으로 알려졌었으며 16세에 장악궁기(長樂宮記)로 한성
시(漢城試)에 장원하고 24세 때에는 생원(生員), 진사(進仕) 양장원(兩壯元)을
차지하여 양장원을 주지 않는다는 전례를 깨뜨렸다. 26세 때에는 문과에 급제,
정계에 투신하여 청요(淸要)의 직(職)을 두루 거쳐 32세 되는 기묘년에는 홍문
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지제교(知製敎) 겸(兼)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
관(春秋館)수찬관(修饌官)에이른다.
◆성리학적이상사회의실현
그는 일찍이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년)의 문하에 나아
가서 주자성리학을 이어받았으므로 동문 선배인 정암 조광조 등과 더불어 도학
정치(道學政治)의 이상을 구현하려는 급진적 개혁론을 주장하게 되었고, 관계
에 진출하여서는 중종의 비호 아래 이의 실천을 강행하던 중 이들과 이해가 상
반되던 훈구파들의 노련한 정략에 휘말려 을묘년(1519년) 말에는 반역당으로
몰리는 정치적인 위기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기묘사화로 중종반정 이
후 새로이 진출한 사림들이 일망타진되는 크나큰 정치파동이었다. 이로 말미암
아 조선왕조의 국시(國是)인 주자성리학을 이상적으로 실천해보려던 사림들의
꿈은 일차적으로 크게 좌절되고 정국은 보수 반동적 경향으로 급선회하게 된
다.그러나이시기는이미조선왕국이건국한지100여년이지나서그동안국
책으로 보호 장려해 온 주자학은 그 이해와 연구가 본 궤도에 올라 있어 이미
조전사상으로 뿌리를 깊이 내리기 시작한 때였다. 따라서 이러한 정국의 변화
는 표면적인 시대착오적 역류현상에 불과할 뿐 사조의 주류와는 무관한 것이었
으니 박해를 받고 산야로 쫓겨난 이들 선비들의 착실한 학문 활동은 도리어 퇴
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와 같은 불세출의 대학자를 비롯한 뭇별들과 같이 수많
은 주자 학도들을 길러내서 주자학 자체를 학문적인 완성의 단계로 발전시켜
조선성리학의 기틀을 마련하고 선조의 등극을 전후해서 이들 신진사류들이 대
거 정치일선에 참여함으로써 결국 성리학적 이상정치의 실현을 지향하게 된다.
그러므로 소위 기묘명현(己卯名賢)들이라 불리는 일군의 사림들로부터 조선성
리학의 단초가 열리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데 이를 증명하는 듯 이들의 서화
나문학작품등에서조선고유색이점점두드러지게나타나기시작한다.
3장인수체│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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